"3시간도 넘게 기다렸어요,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나요"
환자분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얘기한다.
이 환자분은 내가 오늘 오전에만 70명째 보는 환자이다. 벌써 시간은 오전진료 종료시간인 12시를 훌쩍 넘겼다. 나도 제법 지친 상태이다. 70명 정도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고 무엇보다 화장실에 정말 가고 싶다. 정말 이렇게까지 참으면 방광암에 걸리지 않는지 걱정이 된다. 너무 못 참겠으면 잠깐 중단하고 화장실에 다녀오지만 그동안 또 밀리게 된다. 이미 진료실 밖은 불만 투성인데.. 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선은 이 환자를 달래야 한다. 달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나도 이제 의사 짬밥이 몇 년인데…
처음에는 그냥 환자의 불평을 무시하고 바로 진료를 진행했다. 하지만 환자도 불만족스럽고 나도 불만족스러운 일이다. 컴플레인을 해결하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당사자와 같은 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와있었다. 그래서 내가 요새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3시간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이 병원 정말 문제가 있습니다. 병원에 민원을 제기하시지요’
정말 이렇게 말하면 많은 환자들은 적어도 나한테는 컴플레인하지는 않는다. 역시 인터넷에서 알려주는 정보는 놀랍다. 실제로 환자분들이 민원을 제기했으면 하기도 한다. 병원 경영진 입장에서도 자꾸 민원이 들어와
야 뭔가 대책을 마련해 주니깐 말이다.
나는 대학병원에서 만성질환을 보는 의사이다. 주위에서 교수라고 불러주긴 하지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식 임용된 교수는 아니다. 대학병원에 가면 모든 의사들을 교수라고 불러주지만 사실 그건 적은 돈으로 일하게끔 위신을 세워주려는 꼼수이고 대학병원의 대다수의 의사들은 계약직 교수 신분이고 정말 정년이 보장받은 진짜 교수는 소수이다. 재계약해주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
나는 정식 임용을 꿈꾸며 대학병원에서 진료하는 가짜 교수이다. 물론 대다수의 환자들은 그 차이를 모른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가 그러하듯이 일은 가짜 교수들이 더 많이 더 열심히 한다. 경영진 눈에 들어야 진짜 교수가 될 수 있기에.. 나는 대학병원 소위 필수의료과에서 일한다. 이제 사람들도 알지만 필수의료과에서 일하는 의사일수록 불쌍하다. 필수의료과에 있으니 갈수록 뛰어난 젊은 의사들이 지원 안 하고 소위 안 뽑았으면 하는 의사들이 지원한다. 직장에서 조금만 같이 일해보면 저 직원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병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저 사람이라도 안 뽑으면 미달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 뽑았으면 하는 의사를 뽑는다.
드디어 마지막 70명째 환자를 무사히 보고 진료를 끝냈다. 보통 대학병원 진료를 3분 진료라고 비판하는데 나는 그래도 계산해 보니 3분 30초 정도는 봐주는 것 같다. 간혹 그래도 그렇게 보고 나면 스스로 대견하다. 물론 3분 30초마다 환자를 보고 나면 대다수 환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처방의 오류도 자주 있어서 환자들이 약국에서 되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그럴 경우 사실 말은 안 해도 환자들에게 미안하고 쪽팔린다. 하지만 3분 30초 만에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 아니냐 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사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의사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정도로 진료를 보면 확실히 실수가 많아진다. 그리고 실수는 확실히 진료시간 초반보다는 마지막 부분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나도 사람인지라 진료시간이 흐를수록 소위 ‘대충’ 환자를 보게 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내가 이렇게 많이 환자들을 진료하는가. 내가 무슨 전국적인 명의도 아니고 우리 병원은 더더욱 전국구급 병원도 아니다. 그냥 적당한 의과대학에서 적당히 공부해서 대학병원에서 적당히 가짜 교수로 활동하는 내가 이 많은 환자들과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작은 진료실 안에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지금부터는 이야기들을 풀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