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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7 프리라이팅

제시어 : 흔적

by 유념 Mar 18. 2025

우리에겐 언제부터 말소리보다는 한숨 소리가 많아졌다. 평범한 대화로 시작했다가도 격한 감정이 더해지고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진다 싶으면 약속한 듯이 둘 다 입을 꾸욱 다문다. 그리고 찾아오는 정적이 숨 막히게 답답하다. 이건 분명 헤어짐을 누군가 말할 때가 된 거 같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그동안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 만 같아 그 막연한 허무함이 두렵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이별을 말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네가 나에게 이별을 말한다면 그것 또한 끔찍이 싫어지겠지. 이렇게 쳇바퀴 돌 듯 누구 하나 내려가지 않고 눈치만 보다 서로가 만들어낸 멈추지 않는 고통에 갇혀 모두 지쳐간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네가 결국 나에게 칼자루를 쥐여 준다. 넌 항상 그랬다. 내 입을 통해 네가 얻고자 하는 걸 말하게 한다. 그 잔인함을 견디다 못해 조금씩 죽어 간다는 건 전혀 모르는지 매번 나에게 잔인한 죄책감을 선사한다. 대체 지금 넌 무슨 말을 듣고 싶길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낼 수 있음에도 질질 끌고 가게 되는 이 상황이 버겁다. 그래, 네가 원하는 말을 해줄게.


“그만 만나자, 이 말이 듣고 싶니?”

“넌 항상 그런 식으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더라? 네가 원하는 걸 말하는데 왜 내 탓인 것처럼 말해?”


나보고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단다. 지금까지 누굴 사랑해 왔던 거지. 우리는 정말 사랑을 했나. 혹시 사랑이란 탈을 쓴 또 다른 허상에 빠져있었던 건 아닐까.


“항상 내가 문제지. 나만 문제야. 그만해. 그래, 내가 원해.”


네가 쥐여 준 칼자루에서 칼을 빼어 들고 마지막으로 휘두른다. 내가 휘두르기엔 매번 벅찼던 그 칼을 있는 힘껏. 


흔한 정적. 


우리에겐 당연했던 그 정적이 결국 이별을 불러오는구나. 어느 순간 서로에게 하고픈 말이 없어졌을 때 그 관계는 죽었던 거다. 그 시체를 붙들어 안고 그저 깨어나길 바라고 있었나 보다. 혐오스럽게 썩어가고 벌레가 끓고 악취가 날 때까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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