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두 얼굴

자각과 성찰의 감성 테마시

by 정하

바다의 두 얼굴


바닷속을 뒤집으며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를

격랑이라고 했던가.


잔잔한 바다는

평온하지만

가끔은

너무 모범적이다.


아침 햇살이

어둠의 휘장을 젖히면

바다는 파란 가슴을 열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길을 내준다.


안개를 품었다가

말간 햇살로 몸을 씻은 섬을

슬쩍 꺼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 노을이 만들어준

붉은 수평선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 잠든다.


수천 번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는 파도가 없었다면

바다는

밑바닥부터 부패해 가는

푸른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폭풍이 오면

바다는 얼굴을 바꾼다.

굳어버린 평온을 던지고

수심 깊은 데서부터

격렬한 광기로

자신을 찢는다.


흰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리는

짐승이 된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물보라가 멈추면

수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의 숨결을 회복하고

바닷속은

새 생명을 얻는다.


내 마음도

그런 바다였을까.


빨간 날 하나 없이

설렘과 기대가 증발한

11월의 달력 같은 나날들.


책임은 꼬박꼬박 출근하고

의무는 퇴근할 줄 모르는

그 사이를

무한정 걸어야 했다.


한 번쯤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가 되어

모든 의무를 폐기 처리하고

오로지 나를 위한 나로서

격렬한 열기에

휩싸이고 싶었던 날도 있었지만,


평온한 하루를

착실히 살아내는 동안

말들은 점점 닳고

감정은

어디에 두었는지 잊혀졌다.


오늘은,

아주 잠깐만이라도

파도의 하얀 이랑 하나쯤

내 심장에 들이기로 한다.


뜨거운 열기로

굳어진 생을 갈고

그 이랑에 가슴 먹먹한

언어의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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