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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되는 날

<기사의 노래>

by 둔꿈

"운명이여 내가 간다. 거친 바람이 불어와 나를 깨운다. 날 휘몰아 가는구나~"


돈키호테의 대사가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예전에는 배우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만 매혹되어 이 시간을 즐겼었는데, 이제는 단어가 그리고 문장들이 마음에 와닿아 눈을 감고 음미하며 듣는다.

돈키호테가 말하는 '거친 바람'이 그의 인생에서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운명 속으로 '휘몰아 들어간' 그를 상상하고 있자니 마음이 웅장했다가 다시 묘하게 애잔해진다.

잔잔한 미풍으로 평온한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만, 운명이 선사하는 것은 거친 바람이다.

그 거친 바람이 내 앞에 어떤 미래를 펼쳐지게 할지 몰라 두려운데도, 우리는 휘몰리기만 할 뿐이다.

갑자기 예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건 그냥 일어난 일일 뿐이야."

그렇다. '거친 바람'을 향해 그리고 '그냥 일어난 일'에 대해서 과하게 분노하는 것도, 과하게 슬퍼하는 것도 사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격풍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하며 주저앉아 버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리고 이상한 확신이 든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에서도 그렇듯 거친 바람이 선사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닐 것이라는 느낌?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 극단이 준비하고 있는 '돈키호테'라는 극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는 꿈꾸는 무엇인가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다는 것!


떠오르는 생각들에 휘둘려 잠깐 연극의 흐름을 놓쳤다 다시 무대를 바라본 나는 깜짝 놀랐다.

산초 역할을 맡은 여배우 한 분이 신발을 옆쪽에 벗어놓고 양말 바람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역할을 할 때는 재미나게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역할이 끝난 뒤에는 뒤로 물러서 묵묵히 앉아 있는 그녀의 진지한 옆모습이 마치 어떤 수도자의 일상을 보는 듯했다.


그녀도, 매일 힘겨운 하루 직장일을 끝내고 모인 극단 사람들도 전부 사실 이미 돈키호테처럼 거친 바람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하루, 딱 두 시간 동안만 반짝 빛날 무대를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단원들!

무대의 빛만큼이나 그들도 빛난다고 느낀 순간, 오늘의 연극 연습이 끝나며 돈키호테의 마지막 대사가 울려 퍼진다.

"여러분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입니다."


그렇게 나 역시 기사가 된다.

다시 칼을 들고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기사의 노래>


둘시네아,

내 사랑하는 그대여!


내 반토막난 칼을

비웃지 말아주시오.


그제 밤

팔이 네 개인 마타도허 풍차를 만났다오.

어제 밤

입에서 불뿜는 괴물 개와 싸웠다오.


붉게 흩날리는 시간 속에서

반토막난 칼을 들고

나는 살아 돌아왔다오.


둘시네아,

그대의 그제와 어제를 지켰듯


오늘과 내일도

그대 곁에 있겠오.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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