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던 시간 끝에서
그날 이후,
나는 사람을 피하기 시작했다.
잘 지내냐는 질문이 두려웠고,
우연히 마주칠 얼굴들이 부담스러웠다.
이상하게도
잘되고 있다는 말만 들리면
내가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날들이 있었다.
친한 후배들의 전화 앞에서도
반가움보다 먼저 떠오른 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나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은 레슨이 취소되어
일찍 귀가하려고 학원을 나섰다.
날씨는 내 마음과는 달리 유난히 화창했고,
쓰린 속을 달래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지금은 송바이올린을 운영하고 있는, 정말 친한 후배 재화였다.
너무 반가웠지만
나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피했다.
오랜만에 마주친 얼굴이었지만
초라해진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지내던 무렵,
현우의 덕원예고 합격 소식과 함께
2010년의 겨울을 맞이했다.
연말 분위기는 들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레슨 취소는 잦아졌고,
그만두는 학생들도 하나둘 생겼다.
전공생은 늘어났지만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취미반을 다시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학원을 시작했을 때처럼
다시 바닥부터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전단지를 들고 아파트 단지를 돌고,
학원 앞에서 다시 연주를 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리고 2011년이 되어서야
내가 가야 할 방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성인 취미반의 활성화였다.
당시 총무를 맡고 계시던 석 총무님은
레슨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선생님, 성인반 연주회를 따로 열어보면 어떨까요?”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호응이 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결국 마음을 먹고
부담을 안은 채 준비를 시작했다.
남아 있는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해 1월부터
문의 전화가 하루에 두세 통씩 꾸준히 오기 시작했고,
학생 수는 빠르게 늘어
마침내 30명을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2월,
세 번째 정기연주회를 열게 되었다.
이전 연주회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준비했다.
배운 지 한 달 남짓한 학생들에게도 용기를 주었고,
성인분들께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권했다.
그중에는
끝까지 완강히 거부하시던 스님 한 분도 계셨는데,
결국 무대에 함께 오르게 되었다.
같은 장소, 신한아트홀.
약 20명 정도의 인원이 무대에 섰다.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MR 반주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고,
전공생들도 함께해
이전보다 훨씬 풍성한 연주회가 되었다.
작은 실수와 시간 착오는 있었지만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다만,
여전히 자존감은 낮은 상태였고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완전히 멈춰 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