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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Oct 25. 2024

어느 가을, 뜻밖의 선물

황금빛 해변에 관한 이야기


머리칼을 어지럽히는 거친 바람마저 반가운 가을이었다. 공항 출입구에 서면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는 여러 그루의 야자나무를 마주하고서야 우리가 제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2016년 9월, 양 손 가득 무겁게 짐을 든 남편과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를 신줏단지처럼 소중히 쓰다듬는 나, 나의 손길에 응답하듯 통통 뱃속에서 신나게 태동을 즐기던 너. 싱그러운 가을, 제주 공항에 우리 셋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무난하게 임신이라는 과정을 누리는 산모 중 하나였다. 그 흔한 입덧도 해 본 적 없고, 피부는 오히려 더 탱탱하게 빛났으며, 머리숱이 거의 2배가량 늘었지만 여전히 머릿결은 미역처럼 매끈했다. 임신 5개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오히려 몸이 더 가볍게 느껴지고 에너지도 넘쳤다. 어느덧 임신 7개월 차, 배 크기만 보면 당장 출산을 해야 한 대도 전연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아무리 품이 넓은 티셔츠와 원피스를 걸쳐도, 가벼운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녀도 짐볼처럼 부푼 배의 거대한 존재감은 숨길 수 없었다. 먼 거리에서 대충 스쳐보기만 해도 영락없는 임신부의 형상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토록 좋은 날, 더없이 좋은 컨디션으로 제주에서 태교여행을 꾸린다는 사실만으로 벅찼으니까. 


 

남편의 즉흥성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므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혼자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짐했었다. “이번 여행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 것이 나의 계획이다! 절대로 계획하지 않는다!” 오가는 비행기 표와 마음에 쏙 들었던 숙소만 결정해 두고 여행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부러 관심을 껐다. 가 보고 싶은 식당이나 해변, 명소들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다양한 리뷰나 추천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문처럼 외웠던 다짐은 꽤 효력이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운명이 이끄는 대로 여행을 진심으로 즐겨보고 싶어졌다. 실제로 우리는 발길이 닿는 대로 제주에서의 하루, 하루를 살았다. 그저 ‘느낌’이 이끄는 대로, 가을바람이 등 떠미는 대로, 우리의 시선이 빼앗기는 대로 움직였지만 조금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 나름의 재미가 있어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정함을 즐기기까지 했다. (이후 3박 4일 간 우리가 움직인 경로를 되짚어 본 적이 있는데, 제주를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저리 횡단한 것을 보여 둘 다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에서 보내는 셋 째 날이었다. 그 밤이 지나면 아침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남은 하루를 촘촘히 채우고 싶은 마음에 발바닥이 뜨거워질 만큼 열정적으로 돌아다녔다. 하루의 고단함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었던 우리는 흑돼지를 미친 듯이 흡입했고, 이내 터질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미련스러운 먹성을 후회했다. 이대로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면 뭔가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은 포만감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일단 좀 걷는 게 좋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다짜고짜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한림공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흔한 제주 관광 코스 중 하나였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터질 듯한 식사량을 소화시키려면 이 정도 규모는 되는 공간을 구석구석 걸어야할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소화를 시켜야 했다. 


둘은 걷고 또 걸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식물들 앞에 멈춰 서서 각자의 단상을 공유하고, 번갈아 돌하르방 흉내를 내 가며 누가 더 잘 따라하나 내기도 했고, 향긋한 꽃내음이 유혹하면 코를 가까이에 박고 한참을 킁킁 거렸다.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의 배가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다고, 우리 둘은 어디서든 그저 즐거울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애정표현을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공원을 빠져나왔다. 충만한 마음이었다. 그 때였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제까지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하찮은 존재가 되어 흩어질 정도로 광막한 광경 앞에 우뚝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현실감을 되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넋을 빼앗긴 채 우두커니 눈앞에 펼쳐진 생경한 광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공원 주차장 제일 안쪽에서부터 보이는 커다란 나무 틈새로 으리으리한 금빛 건물이 번쩍이고 있었다. 눈이 부셔 정면으로 응시하기가 힘들 정도의 반짝임이었다. 통유리로 된 고층 빌딩의 표면을 누군가 온통 금빛으로 도금이라도 해 둔 것 같은, 그야말로 금빛 물결의 향연이었다. 둘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쪽은 분명 해변이 맞는데 커다란 건물이라도 들어선 건가 커다란 물음표만 동동 띄운 채 빛이 새어 나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의지가 아닌, 주술에 이끌린 듯 한 발걸음이었다. 

 


금빛 일몰. 우리는 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황금빛 석양 아래 금빛으로 물든 해변이 온 몸 가득 일렁이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남편은 거듭 “말도 안 돼.”를 외치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극찬했고, 나는 다급하게 가방에서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지만 10분의 1도 앵글에 담기지 않는 그 찬란한 반짝임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도 잊은 채 곧장 해변으로 직행하는 내내 우리의 시선은 금빛 해변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해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시간을 느긋하게 녹여내고 있었다. 마술 같은 풍경에 그림 같은 사람들의 검은 실루엣. 1초라도 더 오래 그 속에 함께 녹아들고 싶었다. 당장 신고 있던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졌다. 두 발을 천천히, 그러나 누구보다 다급하게 바닷물에 담갔다. 황금빛 석양 속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날만큼 아름답고 눈부신 황금빛 일몰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모든 순간을 눈에, 마음에, 머리에 담았다. 발로 물장구치는 남편 곁에서 연신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까꿍아, 엄마랑 아빠가 지금 뭘 보고 있는 지 알아? 세상에, 황금빛 세상이야. 너랑 같이 봐서 너무 기뻐!” 달뜬 표정의 남편은 이내 내 배에 얼굴을 착 갖다 붙이고는 아이에게 너를 몹시 사랑한다고, 지금 엄마 아빠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되뇌었다. 


발목 근처에서 간질간질 찰랑이던 바닷물의 시원한 감촉, 일렁이는 물결 따라 곱절로 늘어나던 석양의 금빛 인사, 서로 맞닿은 우리 두 사람의 뜨거운 온기, 이 모든 순간을 다 듣고 보고 있다는 듯 뱃속에서 통통 춤추던 아이의 움직임 ……. 먼 훗날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결정적 기억 조각을 끄집어낸다면 단연 가장 커다랗고 환하게 빛날, 선물 같고 기적 같은 저녁이었다. 그 날, 그 화려하고도 고즈넉한 풍경 가운데 서 있었던 우리 둘 아니 셋을 한 편의 글로 영원히 간직한다. 협재해수욕장, 2016년 9월 가을의 어느 날, 금빛 노을, 우리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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