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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Oct 29. 2024

뜨겁게 채워지는 마음

아픔 너머로 스며드는 온기

 

 

"으흐흐흐흐엉, 오빠아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통화연결음이 끊기자마자 남편을 부르며 울었다. 회사 거래처 조문으로 대구까지 가 있을 (정신없는) 남편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황한 남편이 물기 어린 내 목소리에 한껏 당황한 게 느껴졌다. 어린아이처럼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아프고 서럽고 속상한 저녁 6시 15분이었다. 

 

 

 

전날부터 밤새 거친 기침이 튀어나왔다. 기침감기가 시작되려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퇴근 후 헬스장에 들를 심산으로 모든 짐을 꾸려 평소처럼 출근길에 올랐다. 도착해 연구실 의자에 앉는 순간 직감했다. 아, 나 엄청 아프구나. 심각한데? 목구멍이 꽉 조여 오는 느낌에 따뜻한 물을 연신 삼켰다. 이 때 자칫 잘못하면 목소리가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는 걸 무수한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내 음성이 한 톤 내려갔어도 다행히 아예 소리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강단에 서는 일은 곧 목소리가 상품이기도 해서 정말 중요하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뼈 마디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짚어낼 수 있을 만큼 서늘한 바람이 신체의 곳곳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있고 싶은데 자꾸만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자꾸만 까무룩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열감이 오르면서 숨이 가빠졌다. 살갗을 날카로운 칼날로 아주 얇게 포를 뜨는 것 같은 서걱한 감촉이 피부 위로 스쳤다. 입고 있는 옷감의 감촉마저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책임감 하나로 버텼다. 강의가 두 개나 있는 날이고 중간고사 성적을 공개해야 하는 날인 데다 9월에 있었던 잦은 공휴일을 생각해서 더 이상 휴강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버티고 퇴근하자마자 병원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사이 기침 소리는 더 탁해졌다.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이크에 바싹 붙어 작은 음성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마이크 성능이 좋아 다행스러운 한 편, 이 정도면 거의 ASMR 수면 음성에 가까울 텐데 졸림 유발 강의에 더 가깝지 않나 염려스럽기도 했다. 평소보다 10분가량 강의를 빠르게 끝냈지만 중간고사 성적과 관련한 개인적인 질문들을 다 받아야 했으므로 큰 차이는 없었다. 강의를 모두 마친 시각은 5시 40분. 다급히 자주 방문하는 병원을 검색했다. 다행히 6시 30분까지 접수를 받는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바로 출발하면 6시 15분경에는 도착할 수 있는 시각이었다. 

 

다급히 차를 몰아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6시 10분. 환히 켜진 병원 내부 전등 불빛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겨우 버티고 버텼다. 핸들을 잡은 두 손에, 엑셀 위로 올라간 오른발에 잔뜩 신경을 집중하느라 진이 쭉 빠졌다. 그 사이 몸은 더 뜨거워졌고 몸은 제멋대로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병원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데 덜컥! 큰 소리를 내며 문이 꼼짝 않았다. 유리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자 접수처 직원이 양 팔로 X 표시를 들어 보인다. 마감을 했다는 뜻이다. 6시 30분까지 접수한다고 하지 않았냐는 목소리는 유리문 너머로 들릴 리 만무했고, 나의 다급함을 표현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무사히 접수한 몇몇 환자들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으나(아직 진료 중이었으므로) 낙담하고 몸을 돌렸다. 

 

급한 대로 건너편 병원을 찾았다. 만약을 대비해 확인했던 그 병원도 6시 30분까지 접수하는 곳이었다. 길을 건너는 데 밤바람이 몸을 스칠 때마다 주저앉을 것만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두 번째 병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6시에 마감했다는 직원에게 인터넷에는 30분까지라고 되어 있어서 급히 왔다고 소심하게 항변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잘 모르긴 해도 위태로운 내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접수처 직원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근처 병원은 아마 거의 마감일 거라고, ** 마트 내부의 한 병원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곳은 다른 병원보다 늦은 시각까지, 주말에도 진료하는 곳이었다. 그곳을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다시 건너편 주차장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그 길로 곧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울음에 남편은 속상함을 그득 실어 걱정했다. 응급실이 없으니 불편하다는 말과 함께(최근 우리 동네의 큰 병원 하나가 문을 닫았다) 정 안 되면 조금 거리가 있어도 응급실이 있는 옆 동네 병원을 찾는 게 어떠냐, 마트까지는 운전해서 갈 수 있겠느냐 등등 부산스럽게 나를 챙겼다. 서럽다고, 너무 속상하다고, 목소리를 들으니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고 갖은 핑계를 대며 눈물을 훔쳤다. (길가에서 서럽게 우는 다 큰 성인을, 주변 사람들이 어색하게 보며 스쳐 지났다.) 차에 다시 몸을 싣고 마트로 향했다. 어쨌든 꼭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마트에 가는 길, 시어머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괜찮으냐고 묻는 것을 보니 남편이 전화를 한 게 틀림없었다. 괜찮다고 서러워서 그랬다고 설명하는데 또 눈물이 터진다. 이 정도면 눈물 감기에 걸린 게 틀림없다. 마트 근처에 살고 계신 시부모님은 본인들도 지금 집에서 나서겠다고 말씀하셨다. 혹시 거기도 안 되면 아버님 차로 더 큰 병원에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겨우 마트 내 병원에 도착해 다급히 접수를 마치자 이내 시부모님도 병원으로 들어오셨다. 반쯤 넋이 나간, 기운 없는 내 모습을 보고는 두 분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링거라도 맞아야 할 텐데 걱정이라며 나를 살피셨다. 시아버지는 저녁도 아직 못 먹은 것 아니냐며 죽을 주문 해 두겠다 서두르셨고, 먹고 싶은 것이 있냐 거듭 물어보셨다. 시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30분가량 기다려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그냥 목감기로 보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고, 그렇다고 독감이나 코로나를 의심하기에는 너무 초반이라 키트에 반응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해 주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일단 약은 물론, 링거와 항생제 주사를 처방할 텐데 이 주사를 맞고도 상태가 전혀 괜찮지 않으면 독감이나 코로나일 가능성이 높으니 다시 병원을 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힘 없이 수액실로 들어가 누워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 내 팔목을 살폈다. 혈관이 잘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시는 그분께 원래 주사 바늘 잡기가 힘든 혈관인 거 안다, 미안하다고 말했더니 오히려 고개를 크게 저으며 그게 무슨 미안할 일이냐며 그렇게 생각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첫 번째 시도는 보란 듯이 실패. 아픈 몸에 여러 번 바늘을 찌를 수 없고, 게다가 남은 (가능성 있는) 혈관이 하나뿐이니 꼭 성공하고 싶다며 다른 간호사분을 불러주셨다. 다행히 두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혈관을 타고 약이 흘러 들어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콧바람을 타고 약 내음이 훅 끼쳤다. 

 

그제야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누가 보면 감기가 아니라 맹장이라도 터진 줄 알겠다고. 괜히 연락을 해서 부모님께서 병원까지 오셨다고, 죄송스럽다고 하니 '내가 곁에 없으니까ㅠㅠ'라는 답이 돌아왔다. 평소 어지간히 아파서는 아프다의 'ㅇ' 자도 꺼내지 않는 나를 잘 아는 남편은 아마 오늘 나의 눈물 젖은 전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게 틀림없었다. 

 

 

 

한 시간가량 링거를 맞고 누워 있으니 이를 꽉 깨물고 버틴 오늘 하루가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밑에서 약이라도 받아올까요?' 조심스레 물어보던 연구실 인턴의 표정.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 했어도 숨소리와 기침소리가 눈치 없이 고통을 광고한 것 같아 부끄러워 괜찮다고 손을 저었던 나.)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에 빨리 병원을 가 보라고 걱정하던 지인의 메시지. 밤 10시 글쓰기 온라인 모임을 미뤄야 할 것 같다는 나의 연락에 흔쾌히 배려와 걱정을 실어 보냈던 문우들의 마음. 갑작스러운 호출에 제 일처럼 달려와주신 시부모님. 내가 병원 진료를 받는 동안 아이를 보살펴 준 부모님. 횡설수설하는 내게 끝까지 친절함과 다정함으로 일관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그 모든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다시 또 눈물방울로 흘렀다. 

 

수액을 맞고 나오니 시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병원비는 이미 계산했다며 뜨끈한 죽 두 팩을 건네시는 손길에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서 들어가서 쉬라고, 자고 일어나서도 아프면 링거 또 맞으라고, 감사 인사는 하지 말라는 말씀을 끝으로 돌아서는 두 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죽이 담긴 가방에서 뜨거운 온기가 뭉근하게 퍼졌다. 

 

제 몸 관리는 스스로 하는 것이 익숙한 삶을 살았다. 어릴 적부터 여간 아파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고 스스로 병원을 오다녔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누가 걱정해 준다고 해서 안 아파질 것도 아닌데 부러 동네방네 소문 낼 필요도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고통 속에 침잠해 있어도 가타부타 말을 길게 하지 않는 것이 익숙한 내게 주어진 어제저녁의 친절과 다정함은 나의 단단한 껍질 하나를 시나브로 녹였다. 누군가에게 짐처럼 구는 것이, 걱정을 끼치는 것이 민폐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이 무너졌다. 죽의 온기를 타고 뜨거운 다정함이 나를 한 겹 감싸 안았다. 고통에 휩싸인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는 것은 한 알의 약보다 무수한 이들의 마음의 힘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멈추기로 한다.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기로.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도. 그 따뜻한 마음을 거부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담뿍 받아들이기로. 그렇게 유약함 너머의 온기를 마주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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