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가진 작지만 강한 힘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다. 나와 남편의 장점들만을 용케 찾아 본인 DNA에 심고 태어난 것 같은 아이. 한 생명을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시키는 일이 결코 편안하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 부부가 반짝이는 이 아이를 키우는 건 축복이고 또 행운이라 믿는다.
아이가 가진 장점들이 있다. (물론 단점도 있다.) 종종 글쓰기의 소재가 될 것 같기도, 또 한편으로는 모두 쏟아내지 않고 내밀하게 혼자만 간직하고 싶기도 한 아이의 면면들. 나는 그 모습들을 '믿는 구석'이라 칭한다. 그 어떤 모습이어도, 그 어떤 상황이어도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아이만이 가진 힘이다.
목감기 소동이 있었던 밤, 친정에서 내내 나를 기다린 탓에 아이는 평소보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졌다. 평소라면 7시부터 30분간 나와 그 날의 할 일들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미 집에 도착한 시간이 9시를 넘겼다. 고집스럽게 일상의 루틴을 지키는 대신 말은 안 해도 제 딴에 고단했을 아이를 얼른 재우기로 마음먹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드라이기로 머리칼을 말리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아이가 대뜸 숙제가 있다고 말했다. 영어 학원에서 내 준 숙제라는데 내일까지 해 가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숙제일 터, 그럼 지금 해 놓고 자고 싶냐고 물으니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겠다고 답했다. 평소 8시에 일어나는 기상시각을 7시 30분으로 당겨 달라는 부탁이 이어진다. 고작 30분이지만 하루 11시간을 꽉 채워 자야 눅진한 피로감을 털어내는 아이에게는 큰 난관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에도 아이의 선택에 가타부타 말없이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얼른 잠자리에 아이를 눕혔다.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알람 소리에 내가 먼저 눈을 떴다. 갈라진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7시 30분이야. 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 옆구리에 착 붙어 곤히 잠든 기다란 몸이 꿈틀거린다. 퉁퉁 부은 얼굴, 메마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이어진다. '그럼 그렇지, 일어나기 힘들 거 같더라니' 생각하는데 일순간 침대가 출렁인다. 용수철처럼 상체를 일으킨 아이가 저벅저벅 방문을 열고 나선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니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이의 실루엣이 보인다. 식탁에 앉아 연필을 꼭 쥐고 입술을 옴싹거리며 뭔가를 쓰고 지운다. 식탁의자 아래로 짤랑짤랑 리듬을 타며 흔들리는 다리가 가볍다. 잠깐의 투정도, 불만도, 불평도 없이 저 자리에 앉은 아이를 보니 쟤 뭐야, 싶다. 사실 강제성 없는 숙제고, 하고 말고는 선택하기 나름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하는 쪽을 택했다. 바로 그거다. 자신이 할 일을 찾고, 스스로 계획하고, 또 그것을 실행하는 힘. 아이가 가진 본연의 자원이자 나의 믿는 구석.
이른 시각 퍼지는 낯선 소리에 남편도 덩달아 일찍 눈을 떴다. (남편도 보통 8시에 기상한다) 내게서 상황 설명을 듣자마자 쟤가 자신보다 낫다는 너스레를 떨며 아이의 실행력을 한껏 추켜 세운다. 그 말이 꼭 나를 향한 칭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게, 저건 어쩐지 당신 아니고 나 닮은 거 같은데?" 괜히 콧대를 세우며 아이를 바라봤다. 이 정도 가지고 뭘, 하는 표정의 아이가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다. 숙제를 마무리하며 내게 오늘의 아침밥을 주문한다. (꼭 아침 식사를 한다)
시원한 시래깃국과 뜨끈한 밥을 식탁에 올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최고야! 같은 팔불출 칭찬 대신 너를 믿고 있다는, 너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눈길을 한껏 흘려보낸다. 꼭 '공부'를 잘할 것, 우수한 성적을 낼 것에 대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이가 가진 이 힘은 아이를 옳은 길로, 아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세차게 나아갈 물길을 터 주리라 믿는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아이의 찬란한 미래가 빛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