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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11화

불나방 11화: 붕괴

by 밤비


“하, 씹선비 새끼. 지는 뭐 깨끗한 줄 아나.”

“지가 뭐 되는 줄 아는 새낀데 뭐. 그림자도 재수없는 새끼.”

“니미. 평생 가오나 잡다가 뒈져라, 씨발.”


지후 형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욕설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에는 비난이나 분노라기보다 수치심이 더 짙게 묻어났다. 비겁했다. 지후 형 앞에서는 이런 말 한 마디도 꺼내지 못 할 게 뻔했으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지후 형의 존재감은 더 커졌다. 줄줄 흘러나오는 욕지거리가 내 귀에는 오히려 형을 떠받드는 찬사처럼 들렸다. 형은 욕설 한 마디에도 더 높아지고, 우리는 욕설 한 마디에 더 초라해졌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지후 형 옆이 아니라 이 형들 옆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비참했다.




2주 넘게 형들이 안 보였다. 칼 형과 깃대 형은 그렇다 쳐도, 곰 형은 늘 광장 주변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주인 없는 바이크는 모두 곰 형의 부지런한 순찰의 결과물이었으니까. 그런데 세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잠적해 버렸다. 며칠 씩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미리 언질을 해 주던 칼 형이었다. 몸을 사리라는 그 흔한 경고조차 없었다. 나는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차원의 허무함과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그제야 알았다. 광장은 언제든 텅 비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 언제든 내 자리는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에는 세 사람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입과 입을 거치며 조각 같던 말들이 점점 하나의 사건으로 뭉쳐졌다. ‘경찰서’, ‘절도’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지고 부풀려졌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확실한 증거 하나 없이도 점점 모든 게 사실처럼 굳어져 갔다. 소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서서히 가슴을 조였다. 사라진 공백이 너무도 뚜렷했다. 세 사람이 사라진 광장 자체가 이미 증거였다. 덜컥 겁이 났다. 정말 형들이 경찰서에 입건된 거라면, 나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다. 정말 몸을 사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곧장 광장을 떠나 무작정 집에 틀어박혔다. 불 꺼진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던 돈을 탈탈 털어 라면과 물을 잔뜩 샀다. 가능한 오래 집을 떠나지 않을 심산이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도 쉽게 놀랐고, 옆집의 사소한 소란에도 흠칫 몸을 떨었다.


핸드폰 전원은 며칠 째 꺼져 있었다. 인터넷마저 되지 않는 구형 폰이었는데, 선불 충전이 끊기면서 이제는 전화를 걸 수도 없게 됐다. 전화를 걸 번호도 마땅히 없었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무심코 전원 버튼을 눌렀다가 다급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흔쾌히 가불까지 해 줬던 전단지 사장은 돈 떼먹고 튄 놈이라고 내 욕을 실컷 하고 있을 터였다. 일을 끝까지 다 하지 않고 잠적해버렸으니 변명할 말도 없었다. 우리 반 반장이 집 앞을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던 날도 창문 틈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보니 담임이 심부름을 보낸 게 분명했다. 졸업식만큼은 꼭 나오라던 담임의 한숨소리가 귓가에 어렴풋이 맴돌았다. 담임은 학기 초부터 출석일수를 손수 계산해 최소한 채워야 하는 날들을 따로 뽑아주기까지 했었다. 정성일까, 아니면 반 아이들 중 유별난 학생 하나 없는 게 자기 체면에 더 중요하기 때문일까. 벽에 걸어둔 교복은 이제 벽지처럼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차마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작은 소음에도 잔뜩 날을 세우고 웅크려야 했다. 죄 값이란 건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내 몸과 마음이 천천히 썩어가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지후 형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곤 했다. 이렇게 계속 숨어 지내는 동안 형이 나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더는 형의 얼굴을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이제 겨우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아득히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그게 더 견디기 힘든 벌처럼 느껴졌다.


[지금 네가 가진 그 기술, 넌 감당 못해.]


형들이 잡혀간 게 진짜라면, 그건 지후 형이 했던 경고가 백 번 옳다는 증거가 된다. 형의 건조한 목소리가 거듭 귓가를 맴돌았다.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덮어둘 수 있었는데. 이제야 진짜 의미가 피부에 와 닿았다. 형의 말은 일종의 예언이었고,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낙인이었다.


나는 정말 무엇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고립된 섬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새해가 무심히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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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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