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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10화

불나방 10화: 경고

by 밤비


날이 추워질 수록 광장을 지키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 줄었다. 여느 때처럼 태영 광장은 화려하고 소란했지만 광장에 모인 인파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복잡함은 다소 힘이 없었다.


칼 형이 당분간 몸을 좀 사리자고 한 지 6일 차. 경찰의 움직임이 불길했다. 이럴 때는 늦은 시각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것 같은 사소한 움직임도 조심스럽다. 우리의 새벽 날개짓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형들은 점점 광장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또 혼자가 되었다. 분명 평소에도 매일 작업을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일순간 중요한 뭔가가 빠진 듯 하루가 검게 비었다.


일이 없어졌어도 집을 나서 광장에 몸을 숨긴 채 밤을 지샜다. 언제부터 볼일이 많은 몸이었다고 이렇게 공허한가,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었다. 광장 구석 화단 난간에 걸터 앉아 시간을 죽였다. 그 흔한 핸드폰도 내게는 사치였다. 화면을 훑는 손가락 사이에 내가 끼어들 공간은 없었다. 번쩍이는 화면에 머리를 파묻은 애들을 보고 있자니 훨씬 더 심심하게 느껴졌다. 잠이나 더 잘 걸 그랬나. 땅에 발을 질질 끌며 애꿎은 신발 끝만 축 냈다.


“야, 신민준.”


그 이름 하나에 모든 것이 일순간 멈췄다. 지루함도, 시간도, 바람도, 나도. 하얀 운동화 코끝에 시선이 멎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들었다. 내 이름 석 자, 신민준.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건 고사하고 입에 담는 일도 없었다. 딸딸이, 야, 얘, 새끼 … 온갖 호칭 속에서도 진짜 내 이름은 없었다. 별명 같기도 조롱 같기도 한 무엇으로라도 불리게 된 것에 나는 잔뜩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평소 같았더라면 멀리서부터 울리는 배기음에 온갖 신경이 다 빼았겼을 텐데, 요즘은 그마저 무뎌졌다. 둔탁한 그림자가 내 앞에 멈춰 설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광장에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 지후 형 뿐이었다. 저 신발의 주인이 형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또 다른 이유로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토록 나는 ….


고개를 드는 순간, 지후 형의 실루엣이 산처럼 드리웠다. 헬멧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도 그 너머에서 날 꿰뚫는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형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반가움이나 기쁨보다 낯선 두려움이 목을 옥죄어 왔다. 입술이 바짝 말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형은 망설임 없이, 정해진 대사를 읊듯 내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네가 가진 그 기술, 넌 감당 못해.”


짧고 차가운 문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형의 말이 맞았다. 그건 내가 매 순간 눈 감고 애써 외면해 온 현실이었다. 눈 감고 아웅할 수 있을 만큼 티끌만큼 작았지만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불꽃의 무게를 형이 정확히 짚어내고야 말았다. 벌써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 물러설 곳이 있을까. 모든 게 버거웠다.


형은 어째서, 왜 모든 걸 알고 있을까. 그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땅이 빙글빙글 돌았다. 관심일까, 걱정일까, 아니면 혐오일까. 어느 쪽이든 내게 꽂힌 저 눈빛은 내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낙인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 그래서 더 잔인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 하는 말을, 나는 거부할 수 없다.


“뭐냐, 강지후? 너도 얘랑 사업 하나 하게?”


기다렸다는 듯 어깨 위로 익숙한 팔이 턱, 올라왔다. 칼 형이 내뱉은 강지후라는 이름이 귀에 꽂히자, ‘맞다, 지후 형 성이 강이었지’ 같은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감히 입 밖으로 소리내어 불러본 적도 없는 그 이름을, 칼 형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있다. 그마저도 이상하게 부러움의 영역에 넣는 내가 스스로도 한심하고 어이없어 입꼬리가 씰룩였다.


“우리가 좀 바빠서, 번호표 뽑든가.”

“굳이?”


비아냥거리는 칼 형의 말에 지후 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형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우리와 말은 커녕 공기조차 섞기 싫다는 몸짓이었다. 다시 또 불빛 하나가 툭 꺼졌다. 지후 형의 숨결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건 오직 나 하나였다.


“걔 중 3이야. 면허라도 따고 데리고 다녀라.”


몇 걸음 물러나던 형이 불현듯 멈춰섰다. 여전히 헬멧에 가린 얼굴이었지만 그 너머로 뚫고 나오는 기류는 똑똑히 전해졌다. 어쩐지 그 말은 형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보다 더 선명하게, 이건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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