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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불나방 12화

불나방 12화: 졸업

by 밤비


저 멀리 교문이 보였다. 이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도착이다. 교문 위로 펄럭이는 현수막에는 졸업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축하. 축하한다고. 대체 무엇을 축하한다는 걸까. 축하할 것이 있나.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입지 않았던 교복은 낯설고 빳빳했다. 팔 다리에 댕강 올라붙은 교복 끝자락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새 키가, 몸이 컸다.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수염은 일회용 면도기로 대충 쓸어냈다. 아빠가 하던 걸 떠올리며 비누로 거품을 만들어 얼굴에 얹었다. 생각보다 정교하고도 섬세한 움직임이 필요한 일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턱과 인중을 몇 번 쓸었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물건들이 뒤죽박죽 섞인 서랍에서 그나마 멀쩡한 양말 한 켤레를 꺼내 신고도 해결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운동화. 한 겨울에도 맨날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운동화에 발을 넣는 순간부터 알았다. 그 사이 발도 운동화가 벅찰 정도로 자라 있었다.


교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건 오랜만이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져 몰래 캡 모자에 후드까지 깊게 눌러쓰고 라면을 사러 나와야 했던 밤들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을까봐, 나를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을까봐 누군가와 마주치는 것이 어려웠다. 막상 지난 밤길에서도, 그리고 오늘 등굣길에서도 나와 시선이 얽히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이내 이대로 영원히,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복잡하고 엉망진창인 마음이었다.


꽃다발로 수놓인 교문을 지나자 강당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가 본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미 식은 끝난 모양이었다. 복도에는 꽃과 선물을 든 어른들과 카메라 플래시가 가득했다. 한껏 들뜬 웃음소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교실 안은 더 요란했다. 책상마다 알록달록한 꽃다발이 수북하게 흘러 쌓여 있었지만 어디에도 내 것은 없었다. 나의 등장에도 교실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힐끔 돌아보는 눈길들은 낯섦에서 비롯된 반사적 시선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출석일수를 간신히 채우고 나서는 한동안 학교에 발도 들이지 않았으니까.


비척거리며 텅 빈 자리에 몸을 집어넣었다. 의자마저 나를 거부하는 듯 삐걱이며 낡은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담임이 졸업장 뭉치를 안고 교실로 들어섰다. 교실 안의 떠들썩한 동기가 잠시 잦아들었다. 담임과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온전히 한 사람과 시선이 얽히는 순간이었다.


“얼씨구. 얼굴 까먹겠네. 졸업은 해야겠다 싶었나 보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담임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곧장 차례로 졸업장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한 두 마디씩 짧게 덕담을 건네는 것 같았는데, 당사자가 아니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쭈뼛쭈뼛 앞으로 나서자 담임이 졸업장을 건네며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도 잘 왔다. 잘 가고.’


제대로 축하해주는 이 하나 없는 졸업장을 품에 안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괜히 뻘쭘해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지만 남아있는 거라곤 스팸 문자 두 개 뿐이었다. 망망대해 어딘가에 떠 있을 아빠가 내 졸업식을 알 리 없었고, 설령 안다고 해도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들 주고받는 그 흔한 ‘축하’, 그거 하나쯤은 받아보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내 몫은 없었다.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손에 들린 졸업장이 한없이 무겁고 짐스러웠다. 교복에 억지로 몸을 집어넣을 때부터 불편하더라니. 오늘, 학교에 있었던 그 어떤 사람들 중 가장 낯설고 어색한 존재는 바로 나였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가벼운 축하조차 없는 그 곳에 나는 무엇을 바라고 참석했던 걸까.


펼쳐본 졸업장에는 내 이름과 학교 이름이 나란히 찍혀 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이게 뭘 보장해주지. 의미도 없고 낯설고 허무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졸업장. 이거 하나라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여겼던 걸까. 앞으로 무얼 할 건지, 고등학교에는 진학을 할 건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질문 따위는 내게 사치였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내가 답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발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작은 운동화에 거듭 부딪힌 새끼발가락 통증에 뒤축을 구겨신고 질질 끌며 걸었다. 한 시간은 걸었을까. 어느새 태영 광장이 눈앞에 보였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결국 또 여기인 건가. 광장 중앙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섰다. 잠시 망설이다 졸업장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제야 복도와 교실의 소음이 완전히 끊기고 귓가엔 적막만이 흘렀다. 비로소 다시, 내 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있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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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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