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게 뭐지. 나한테는 이제 뭐가 있지. 머릿속으로 하나 둘 떠올려본다. 아빠? 며칠 전에 생활비를 통장에 넣었다는 짧은 문자 한 통이 전부였다. 졸업식도, 안부도 묻지 않았다. 내가 지금 몇 살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엄마는 ... 얼굴조차 흐릿해져서 이제는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제 칼 형과 곰 형은 한동안 볼 수 없다고 했다. 남은 깃대 형과 특별히 개인적으로 마주칠 일도 없을 것 같다. 졸업과 동시에 학교와도 끝났고, 담임도 볼 일이 없다. 나를 찾는 사람도, 불러줄 사람도 없다. 텅 빈 방명록 같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빠지고, 결국 남는 건 없다.
텅 비어버린 내 세계 위로 지후 형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 날 이후로 가까이서 형을 못 본지 꽤 되었다. 늦은 시각 광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형의 바이크 소리가 어김없이 같은 시각에 울렸지만 선뜻 근처로 갈 엄두를 못 냈다. 또박또박 힘주어 불렀던 내 이름도, 나의 행적을 모두 다 알고 있는 듯 따져 묻던 경고도 모두 감당하기 힘들고 무거운 것들이었다. 한발짝 먼 곳에서 형의 행적을 눈으로만 쫓았다.
언젠가 번화가에서 교복 차림으로 친구들과 길을 걷는 형을 본 적이 있다. 그 광경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하고 또 충격적이었는지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봤었다. 당연히 학교에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 날 형은 평범한 고등학생 중 한 명처럼 보였다. 교복을 입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시험을 보고 ... 학생이라는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 주말이나 늦은 밤 태영 광장에서의,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형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동시에 나는 형의 그런 모습마저도 하나의 아우라처럼 느껴져서 패배감을 맛보았다. 나도 그랬어야 했을까. 차라리 아무 곳이라도 받아주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나았을까. 그렇게라도 뭐든 붙잡고 있었어야 했을까.
집 앞에 다다르자 숨이 찬다. 이 좁고 높은 골목길은 아무리 오르내려도 좀처럼 적응되질 않는다. 결국 남는 건 하나. 바이크. 지금 내게 남은 건 결국 덩치 큰 저 바이크 하나다. 다른 건 다 잃었어도 이 바이크만큼은 아직 내 곁에 있다. 전 재산을 털었지만 맨날 집 앞에 조용히 세워두기만 한 저 바이크 말이다.
실시간으로 전광판 번호가 하나씩 바뀐다. 서류 냄새와 곰팡이 냄새, 사람들의 체취가 기묘하게 뒤섞인 대기실 공기가 건조해서 코끝을 찡그렸다. 딱딱한 대기실 의자에서는 편히 쉴 수조차 없다. 손에 쥔 번호표를 다시끔 확인한다. 176번. 전광판 번호가 조금 전 150번을 넘었으니 내 차례까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시간을 죽였다.
아빠가 보내준 생활비는 여기에 거의 다 썼다. 저렴한 값으로 허름한 중고서적 하나를 겨우 구해 필기시험을 준비했다. 뭘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 읽으며 내용을 달달 외웠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교통안전교육을 듣고 곧장 필기시험을 치렀다. 시험을 다 치자 모니터 화면에 곧장 점수가 떴다. 62점.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을 겨우 넘다니. 멍청한 머리는 어딜 가나 티가 난다. 실기는 따로 수업을 들을 돈이 없어서 피씨방을 전전했다. 영상을 검색해서 지겹도록 보고 또 봤다. 몸을 이리 저리로 움직이며 볼품없는 셀프 훈련을 실컷 했다. 주변에서 미친놈 보듯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실기와 도로주행 모두 큰 감점 없이 한 번에 합격했다. 새벽 시간, 곰 형이 몇 번 앞자리를 양보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감각들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딸딸이 기술 말고도 내가 할 줄 아는 게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몇 번 떨어질 걸 대비해 생활비를 졸라맸는데 더 돈을 안 써도 된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그 사실이 합격보다 조금 더 기뻤다.
“176번, 176번! 수령하세요.”
멍하니 딴 생각에 팔려 전광판 숫자를 놓쳤다. 직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이 카운터 너머로 면허증을 건넸다.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낯선 내 얼굴.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 작고 납작한 카드가 내 손에 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으로 내가 직접 얻어낸, 훈장 같은 증명서였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졸업장과는 달리, 이건 정말 내 몫이라는 확신이 섰다. 누구도 대신 받을 수 없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 것. 내가 직접 일궈낸 나만의 것.
면허증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허무와 공허 속에서 처음으로 무게 실린 무언가가 존재감을 밝혔다. ‘사람 구실’이라는 게 결국은 이런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카드의 매끈하고 반짝이는 표면의 감촉이 좋아 연신 그것을 문질렀다. 손바닥에서 미끄러질 새라 더욱 세게 움켜쥐며 건물을 벗어났다. 이 작은 플라스틱 조각 하나가, 지금은 나를 증명하는 전부였다. 주머니 깊숙이 면허증을 찔러 넣으며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지금 당장, 만나야 할 사람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