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증을 손에 쥐자마자 광장으로 향해 뜀박질 했다. 한참을 달려 텅 빈 광장에 다다르고서야 아차 싶었다. 평일, 그것도 낮 시간에 형이 여기에 있을 확률은 극히 낮다. 오후 2시. 무작정 기다리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벤치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 걸음을 옮겼다. 긴 공복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진열대를 훑었다. 평소 같았으면 할인 품목 앞에서 배를 채울만한 것이면 뭐든 하나 골라들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도 면허를 딴 날인데. 성대한 파티나 거한 축하까지는 아니라도 나름대로 기분을 내고 싶어졌다. 삼각 김밥과 탄산, 그걸로도 모자라 컵라면까지 하나 골라 들었다. 계산대에 그것들을 쏟아내듯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사치스러운 식사를 앞에 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탄산 뚜껑을 돌렸다. 치익, 소리와 함께 음료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라면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삼각 김밥부터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분명 고상하고 우아하게 면허 딴 날 기념 파티를 즐기고 싶었는데, 우적우적 밥알을 씹어대며 허기를 달래느라 맛을 음미하거나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탄산을 넘기자 꽉 찼던 목구멍이 뚫린 듯 개운해졌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보이고 편의점 내부에 흐르는 최신 가요가 들렸다. 파티는 이제 시작인지도 몰랐다.
컵라면 뚜껑을 열어 천천히 면을 휘저었다. 따끈한 국물부터 후루룩 들이켰다. 거의 매일 먹는 라면인데 컵라면은, 그것도 집이 아닌 곳에서 먹는 컵라면은 아예 다른 음식 같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스프 맛에 혀끝이 저렸다. 가늘고 탱글한 면발을 연거푸 입에 밀어 넣고는 노곤해져 한 쪽 벽에 가만 머리를 기댔다. 그간의 긴장이 단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배가 불러서인지, 면허를 땄다는 사실 때문인지 자꾸만 몸도 마음도 느긋해졌다.
그 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후 형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지후 형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몰려 있는 무리였다. 못 보던 여자애들이 서너 명 끼어 있었다. 다 같이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여자애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지후 형에게만 향해 있었다. 눈웃음을 치고 까르르 높은 소리로 맞장구치며 형의 팔에, 옆구리에 붙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 받아치고 있었지만 그 상황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라는 듯 형의 표정이 몇 번이나 짧게 구겨지는 게 보였다. 멀리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게 마련이었다. 지금이라면, 지금 당장 저 문을 밀고 나가면 말을 걸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저 불편한 상황에서 형을 빼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영웅심리까지 들썩였다.
망상이었다. 영웅은 커녕 형의 그림자에도 겁을 먹는 쪼다 새끼가 바로 나였다. 당장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움찔거리던 몸은 한 순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구석에 납작 엎드렸다. 지후 형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건 내 계산에 없는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후드를 덮어쓰고 테이블에 엎드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형이 담배 한 갑을 계산해서 나갈 동안 대화도, 농담도,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숨죽여 나를 지웠다.
유리문이 열렸다 닫히고 형이 사라지고서야 거북이처럼 머리만 빼꼼 내밀어 상황을 지켜봤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무리에 합류하는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기다렸던 만남인데 왜 나는 숨기 바빴던 걸까. 기회는 분명 내 앞에 있었는데, 보기 좋게 놓쳤다. 숨긴 왜 숨냐, 등신같이. 부끄러운 자책만 흘렀다.
그 후로도 몇 날 며칠이나 허송세월을 보냈다. 형을 만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는데, 형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었다. 광장에서 바이크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고 한 숨 돌리고 있을 때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형이 잠시 골목 모퉁이에 혼자 서 있었을 때도,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또렷하게 형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모두 내 차례 같았지만 번번이 놓쳤다. 매 순간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고, 다리에 힘이 풀렸고, 자꾸만 숨고 싶어졌다. 나는 늘 한 발 늦기 일쑤였고, 뒤늦은 후회만 친구처럼 내 곁에 남았다. 주머니 속 면허증이 허무하게 빛을 잃어갔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오늘이 매일같이 찾아왔고, 특별히 다를 걸 기대할 필요 없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는 빚쟁이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면허증을 자랑스레 형 앞에 내밀 거라던 포부도 몇 번의 실패 앞에 시들해졌고, 지독한 생계 문제 앞에서는 한없이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다. 당장 필요한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채용 공고가 붙은 가게들을 전전했다. 낮 시간에 깨어있는 데에는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쉬지 않고 걷고 움직이려니 여간 힘들고 지치는 게 아니었다. 주방 보조든, 배달이든, 서빙이든 닥치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나중에 연락 준다는 말만 돌아왔다. 자꾸 그러다보니까 그게 좀 더 고민할 시간을 달라는 건지, 아니면 좋은 말로 거절을 하는 건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세상살이 참 팍팍하다 ... 는 생각을 하려던 참에 눈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껌 포장을 뜯어 입에 넣고 턱을 움직이는 형의 옆모습이 햇빛에 드러났다. 그렇게 쫓아다닐 때는 닿기 힘든 거리였는데, 오늘은 지나치게 우리의 거리가 가깝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형에게서 익숙한 담배연기 대신 낯선 달콤한 향이 나는 게 어색해서 잠시 멈추어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봤다. 형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눈썹을 치켜뜰 때까지 멍을 때렸다는 뜻이다.
“왜. 하나 줘?”
“아, 아뇨 ... 네? 아니요!”
딸꾹질 같은 대답이었다. 그런 내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형은 껌 하나를 내밀었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노란 포장지가 도톰했다. 풍선껌이었나. 형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낮 시간에 광장이 아닌 골목이라니. 누굴 기다리는 중인지도 몰랐다. 껌 포장지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저 .. 형. 드릴 말씀이 있어요.”
형의 눈길이 다시 나를 향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