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도 운전할 수 있어요.”
그 한마디가 뭐라고, 목구멍 안까지 덜덜덜 떨렸다. 형은 풍선을 도톰하게 부풀리다 말고 퐁, 터뜨렸다. 모르긴 몰라도 면허증을 내밀고 있던 손도 발발발 떨었을 거다. 형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달콤한 껌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 잘 했네.”
짧은 대답. 그게 전부였다. 뭘 기대했던 걸까. 한껏 들떴던 희열이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바닥에 납작 달라붙었다. 축하파티라도 해 줄거라 기대한 거야? 내가 뭐라고. 한심한 놈. 스스로를 비웃는 목소리가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굴러떨어졌다.
그 때 형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키가 제법 큰 여자애였다. 예전에 편의점에서 봤던 무리 중 하나 같기도 했다.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형만 보다가 여자애와 단 둘이 있는 형은 어쩐지 낯설었다. 그저 등장만으로도 형의 표정이 잠시 풀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이유 모를 쓰라림이 속을 훑고 지나갔다. 형에게 이런 얼굴도 있었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 형의 비밀 하나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혹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까 미간을 좁혀가며 여자애를 뚫어지게 보는데, 형이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여자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11시.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두 눈이 커졌다. 방금, 형이 뭐라고 한 거지? 11시? 따라와? 나 지금 허락 받은 건가? 정식으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동안 수없이 놓쳤던 기회들이 한 순간에 로또 1등으로 되살아난 것 같았다. 기다림의 끝, 드디어 내게도 빛이 드리우는 걸까. 순식간에 마음이 하늘 끝까지 부풀어 올랐다. 그 어떤 축하 파티보다 성대한 초대였다.
완전무장을 하고 11시를 기다렸다. 아무리 날이 풀렸어도 늦은 시각 꽃샘추위는 제멋대로 공기를 차갑게 식혔다. 양 손에 낀 장갑이 어색해 두 손을 마주 비볐다. 제각기 다른 모양의 바이크를 탄 멤버들이 하나 둘 광장 중심부로 모이기 시작했다. 10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움츠러드는 어깨를 애써 털어내며 몸을 곧게 세웠다. 각자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엔진을 켜는 순간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둔탁한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허리까지 전해졌다.
저 멀리, 지후 형이 내 쪽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헬멧을 머리에 썼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수십 개의 불빛이 일제히 켜졌다. 붉은 후미등과 흰 전조등이 얽혀 하나의 궤적을 그렸다. 그 순간부터 도시는 선로가 되었고, 우리는 쉼 없이 달려야 할 운명이었다.
야간열차와 다름없었다. 늦은 밤, 저마다의 불빛을 밝힌 화려한 행렬이 이어졌다. 엔진소리는 합창처럼 겹쳤다가 갈라지며 도로 위를 울렸다. 공기를 찢는 굉음이 고막을 거칠게 파고들었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짜릿한 자유가 터져 나왔다.
차선을 가르며 속도를 올릴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차창 사이로 욕설이 날아들고, 인도를 지키던 경찰관의 경광봉이 흔들렸지만 겁내기보다는 즐기는 쪽을 택했다. 스릴 넘치는 비행이었다. 보란 듯이 지후 형이 선두에서 불꽃을 튀기면 뒤따르는 우리도 차례차례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익숙하던 풍경이 물감 번지듯 흩어졌다.
멀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이 대열의 끝에 정착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숨어든 손님이 아니었다. 허락받은 존재. 비로소 내 몫의 칸 하나가 생겼다. 대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달렸다. 손아귀에 힘줄이 돋고,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 대신 확신이, 외로움 대신 뜨거운 소속감이 가슴을 채웠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전신을 관통했다. 나는 비로소 이들의 일부가 되었다. 더 이상 방관자도, 구경꾼도 아니었다. 달려야 했다. 이유는 충분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긴긴 밤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