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불나방 18화

불나방 18화: 불나방

by 밤비


오늘도 봄비가 내린다. 며칠 째 대중없이 비가 내렸고, 여름 장마보다 더 한 습기가 도심을 가득 채웠다. 하루 종일 검게 드리웠던 먹구름이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다. 늦은 오후부터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밤이 되자 더 굵어졌다. 도로 위는 금세 젖어들었고, 네온사인 불빛은 물 먹은 땅 위에서 번들거리며 사방으로 번지고 흩어졌다. 며칠 째 이어진 강력 단속으로 모두들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긴장감과 설렘은 한 끗 차이여서 우리를 에워싼 이 묘한 분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이번 주부터는 지후 형이 미리 정해준 소수의 인원만 달릴 수 있었다. 오늘 정예 멤버는 형을 포함해 다섯. 그건 태영 광장에 모인 무리 중 절반 이상이 발목이 묶인다는 걸 뜻했다. 선정 기준을 두고 말이 많았지만 모두 형이 없는 자리에서 들끓다가 차게 식었다. 자유롭게 불만을 가질 순 있어도 그걸 솔직하게 드러낼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지후 형의 바이크가 정비소에 들어갔다. 어두운 밤, 빗길에 리어카를 몰던 할머니를 맞닥들인 탓이었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가까운 가교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형 바이크의 앞 포크가 찌그러지고, 기름이 새어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지 않을 우리가 아니었다. 어김없이 모인 새벽 1시. 광장 가득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짙게 깔렸다.


“야, 오늘은 좀 양보해라.”


형이 내 앞에 멈춰 섰다. 저벅저벅, 낡은 운동화 밑창이 광장 바닥의 모래를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형의 그림자가 젖은 공기 속에서 길게 번졌다. 지후 형이 구겨진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내 바이크를 간택했다는 뜻이었다. 형의 권위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후 형은 권력을 내세우기보다 합당한 비용을 지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병아리 키를 형에게 흔쾌히 넘기며,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 하나 믿어주는 사람 없다고 생각한 이 세상에서 나를 좋게 바라봐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퍽 뜨겁고 든든한 일이었다. 오만 원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쩔러 넣으며 배시시 웃었다. 형이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전망대에 가 있던가. 3시에 보자.”


3시에 우리가 다시 만날 장소가 전망대인지, 광장인지 몰라 어버버 거리는 사이 형의 몸은 가볍게 내 바이크 위로 올랐다. 낮고 거친 울음이 광장 바닥을 긁었다. 형의 등에 반사된 바이크의 화려한 LED 튜닝이 보란 듯 번쩍였다. 이윽고 다른 네 대의 바이크에도 연이어 엔진 소리가 그릉, 울렸다. 다섯 대의 바이크가 거친 울음을 터뜨리며 어둠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 둘 점이 되어 사라지는 불빛들을 오래 바라보다가, 이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조금만 더 서두르면 전망대에 올라 지후 형이 이끄는 바이크 대열을 제법 오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꾸만 숨이 차올라 걸음을 멈출 때마다 저 멀리 바이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저 멀리, 어둠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스치는 불빛의 줄기가 간헐적으로 보였다. 머릿속으로 선두에서 내달릴 형의 움직임을 그려보았다. 좌로 붙고 직진, 다시 우측으로. 지후 형이라면 지금쯤 어깨를 살짝 말아쥐고 가속 페달을 더 깊게 밟았겠지. 씨, 죽이네.


전망대에 다다르자 비바람이 좌우로 세차게 흩날렸다. 쓰고 있던 3단 우산이 힘없이 휘청거렸다. 두 손으로 우산을 그러쥐며 아래쪽 도로를 내다봤다. 하루도 빠짐없이 형을 따라 달리던 길. 도시의 불빛과 가로등이 겹치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서두르길 잘 했네, 달린 보람이 있었다. 이정도 거리면 꽤 오랫동안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한 무리의 불빛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빗방울 사이로 번지는 전조등이 물감처럼 흘렀다. 익숙한 행렬의 화려한 움직임은 그 어떤 네온사인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꼭 불나방 같다고 생각했다. 뜨겁고 뜨거운 곳으로, 조금만 더 뜨거운 곳으로. 작고 가벼운 것들이 불꽃으로 몸을 내던지는 형상이 이어진다. 저 영화 같은 진풍경 속에 매일 나도 함께였다는 사실이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내 바이크에 올라탄 지후 형의 등을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봄비가 내려도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 새벽 3시. 지후 형은 끝내 오지 않았다.


keyword
수, 일 연재
이전 17화불나방 17화: 사이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