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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아이가 다섯 살이었던가. 평범한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아이는 재잘재잘 말을 시작하며 엉덩이를 씰룩댔다. 침실 너머로 우스꽝스러운 실루엣이 아른거리는데 남편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저 애가 저렇게 예쁘게 큰 건, 다 당신 덕이야.”


연애 3년, 결혼 9년. 10년 넘게 남편 곁에 있으며 들었던 최고의 칭찬은 ‘욕봤다’가 전부였다. 그런 남편의 입에서 나온 저 말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버버거리는 사이 남편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그 한 마디에 몇 년간 쌓였던 육아 피로가 단 번에 녹아내렸다. 특별한 의도 없이 흘러나온, 남편의 진심.


또 이런 순간도 있다. 남편과 연애 초반, 영화관에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영화를 봤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데, 팔에 닿은 남편의 옆구리가 자꾸만 꿀렁거렸다. 뭐가 불편한가 했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최선을 다 해 참고 있는 거였다. 애쓴 보람도 없이 남편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른 척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 낌새를 알아차린 남편의 눈망울이 나를 향하고, 손을 내밀어 젖은 그의 눈을 닦아줬다. 아이고, 이 여린 남자를 어쩜 좋나.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토록 마음에 남아 있다. 남편의 솔직한 감정이 누출된, 아주 조용한 찰나.


사람 마음이라는 건 거창하지 않다. 엄청난 이벤트도, 드라마틱한 대사도 필요 없다. 그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심 한 마디, 옆구리의 꿀렁거림 같은 아주 보잘 것 없는 틈 하나. 내 감동은 어딘가 어설프고 가볍고 소소한 데서 온다. 찰나의 정직함이, 순수함이 나를 뒤흔든다.


아, 최근에도 비슷한 순간이 하나 더 있었다. 늦은 밤, 맥주 한 캔을 홀짝이는 것으로 하루치 피로를 달랜다. 남편은 그만 좀 먹으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내가 기울이는 것이 단순 알코올만은 아님을 아는 얼굴이었다. ‘내가 우리 마누라 도토리 창고는 안 비게 채워줘야지!’ 동면 준비 하는 다람쥐마냥 냉장고 한 칸을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맥주들로 채워준다. 한 번도 텅 빈 적이 없는, 남편이 마련해 준 나만의 도토리 창고. 자기는 술 한 방울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가득 찬 창고 앞에서 뿌듯해하는 그 모습이 괜히 귀여워서, 이상하게 또 감동 한 방울 추가.


결국, 누군가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치는 순간. 그 순간을 내가 우연히 마주하는 때. 그 때가 아마, 무한한 감동의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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