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냉장고

by 밤비


친정 부엌에 들어서면 커다란 그늘이 드리운다. 냉장고 다섯 대의 흔적이다. 일반 대용량 냉장고 하나, 김치냉장고 둘, 냉동고 둘. 다섯 대의 냉장고가 떡 하니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식구가 많은 것도 아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도 엄마, 아빠, 나 셋뿐이었고 지금은 부모님 두 분의 먹거리만 보관하면 그만인데 냉장고는 여전히 다섯 대다. 심지어 냉동고 두 대는 내가 출가한 뒤에 들였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부엌을 가득 채운다.


냉장고마다 사정이 다르다. 김치냉장고 한 대에는 나이가 다른 김치들이 층층이 쌓여있고, 다른 한 대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재철 재료들과 과일들이 날짜를 잊은 채 잠들어 있다. 냉동고에는 고기와 반찬, 국거리, 양념거리들이 겹겹이 얼어 있다. 얼릴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은 다 냉동고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반 냉장고는 당장 먹는 반찬들 사이로 오래된 반찬통이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손을 끝까지 뻗어야 닿는, 기억에서 지워진 것들이 조용히 썩어가고 있는 셈이다.


한 번은 마음먹고 안쪽의 반찬통 몇 개를 꺼내 하얗고 푸른 곰팡이를 엄마 눈앞에 들이민 적이 있다. 엄마는 부끄러움과 멋쩍음이 겹친 얼굴로 서둘러 반찬통을 비우고 씻어냈다. 보이지 않는 저 구석 어딘가에는, 아직도 치우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것보다 확실하지 않은 언젠가를 위한 음식들로 가득 찬 냉장고. 그 때부터 엄마의 냉장고는 더 이상 음식을 보관하는 가전으로 보이지 않았다. 끝을 미루는, 그래, 생명 연장 장치에 가까워 보였다.


엄마는 좀처럼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놔두면 쓸 일이 있다는 말이 변명처럼 쏟아진다. 새로운 것이 흘러 넘쳐도 오래된 것을 꾸역꾸역 쓴다.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어도 혹시 모를 다음을 대비한다. 이런 습관 아래, 냉장고라고 다를 수 있나. 엄마는 음식이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관하는 사람 같다. 상하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불어넣는 것처럼.


냉장고 다섯 대는 분명 과하다. 생활의 편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불안. 나는 그 안을 그득 채운 그것들에 불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없어서 곤란했던 순간들, 모자라 부끄러웠던 날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 엄마는 그것들을 차가운 공간에 보관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던 걸까. 버린다는 것은 끝을 인정하는 일이니까.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엄마에겐 너무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상실을 미루는 마음이 냉장고를 지배하고 있다.


다섯 대의 냉장고가 있어도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다는 엄마의 푸념을 종종 듣는다. “그냥 오래된 걸 버려!”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억지로 삼켜낸다. 아이가 먹고 싶은 걸 말하면 엄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냉장고를 연다. 냉동고를 열고, 김치냉장고를 열고, 금세 재료를 꺼내 뚝딱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엄마 집에서 손자는 기다릴 필요가 없다. 못해도 소형 마트 하나쯤은 되는 규모의 냉장고가 있는 엄마 집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 일’이란 거의 없다.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엄마의 냉장고 다섯 대는 불안의 증거라기보다는 환대에 가깝지 않을까. 미리 준비된 재료들은 손자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 같고, 필요한 순간에 바로 내어주는 방식의 사랑 같다. 그 끝에는 어린 날의 내가 있다. 모든 음식이 엄마의 손을 거쳐 나왔던 시절, 밖에서 사 먹을 법한 요리들을 집에서 먹던 기억들. 나는 그 어마어마한 사랑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냉장고를 보고 있자면 자꾸만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곳은 불안의 저장고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창고다. 언젠가를 대비해 얼려둔 것들과 지금 당장 아이에게 내밀 수 있는 재료들이 같은 공간에 뒤엉켜 있다. 불안은 늘 미래를 향해 있고, 사랑은 언제나 현재를 향해 있다. 불안을 줄이기 위해 쌓아둔 것들이 아이 앞에서는 환대로 피어난다. 그 복잡한 냉장고의 속사정을 아는 나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불안은 얼려두고, 그 위에 손자를 향한 사랑을 녹여낸 요리가 태어난다. 모든 식재료의 삶을 연장하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지금 먹이는 한 끼만큼은 늘 제때 도착했다.


나는 그 다섯 대의 냉장고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안에 담겨있는 것들을 기억하기로 한다. 버리지 못한 시간과 미루지 않는 사랑. 그 모순덩어리가 엄마의 냉장고에 담겨 있다. 좀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끝끝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엄마가 그렇게 살아 있다.


keyword
이전 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