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색 좋아하세요?"
"주황색이요. 정확히는 해가 저물 때의 노을빛 같은 색이요."
"저기 걸려있는 그림의 홍시 같은 색인가요?"
"맞아요! 저를 하나의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저런 따스함을 주는 색이면 좋겠어요."
"아... 네..."
아내와의 첫 만남 때 저녁식사 후 2차로 간 일본식 선술집에서 나눴던 대화.
마음이 통한다고 취기에 혼자서 착각한 채, 지금 생각하면 아주 낯부끄러운 얘기를 했다.
물론 진실한 속마음이었지만, 상대방은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을 이야기.
시쳇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
먼 훗날 아내는 가리켰던 그림의 색이 솔직히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촌스러운 가운데 비치는 진중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아빠는 무슨 색이 좋나요?"
장난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모형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주며 딸아이가 묻는다.
단골손님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계신 가게 사장님께서 이미 주황색은 올려두신 채 색 하나를 더 고르길 권하신다.
나는 딸아이가 색깔의 선택권을 주면 대개 노란색이나 분홍색으로 답한다.
어렸을 적 내가 제일 좋아하던 색은 파란색이었다.
나의 유년시절, 파랑은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좋아하던 지구방위대나 로봇 만화에서 파랑과 초록은 남자주인공들의,
노랑과 분홍은 여자주인공들의 색이었다.
남자가 노랑이나 분홍을 좋아한다고 하면 놀림감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추억의 지구방위대, 후레쉬맨]딸아이가 살아갈 양성평등의 시대.
인식의 변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성별에 따른 색의 경계는 희석시키고 싶었다.
남자는 무슨 색을 좋아해야 하고, 여자는 무슨 색을 좋아해야 하는지 구분 짓고 싶지 않은 마음.
남자인 아빠도 노랑이나 분홍을 좋아할 수 있고,
여자인 엄마도 파랑이나 초록을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조금은 편견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역시 TMI지만 내가 항상 딸아이 앞에서 좋아하는 색을 고를 때 노란색이나 분홍색을 택하는 이유다.
봄날의 꽃들이 펼쳐 보이는 노랑이나 분홍 계열의 색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봄이 오는 색, 2023년]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딸아이는 나날이 핑크 요정님으로 변신 중이다.
(설마 아빠도 분홍색을 좋아한다 하니 더 경쟁심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새로운 옷이나 물건을 사주려고 어떤 색이 좋은지를 물으면 어김없이 분홍계열을 고른다.
최근에는 작아진 유아용 킥보드를 바꿔주려고 원하는 색상을 고르도록 보여줬다가,
아빠는 왜 굳이 뻔한 답을 고르게 하는 거냐는 눈총을 받았다.
혹시나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로부터 은연중에 영향을 받은 건가 싶어,
딸아이와 가장 친한 동성(同性) 친구네를 만났을 때 슬쩍 물어도 봤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한결같이 제일 애정하는 장난감은 파란색 경찰차이며, 열심히 타고 노는 킥보드도 검은색.
특정 색에 대한 선호는 사회적 요인도 있겠지만 개인의 기질과 성향이 작용하는 것도 분명하다.
[출처 : robocarpoli.com]
성별에 따른 문제라기보다 각자의 특성과 취향에 따른 선호를 존중해 주는 게 더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색을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 있는 배경, 성향, 혹은 지향에 따라 저마다 다른 색을 선호하고 그에 이끌린다.
서로 다르지만, 또 그 다름으로 인해 다른 색과의 어우러짐이 멋진 조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딸아이 앞에서 좋아하는 색으로 고른 노란색과 분홍색을 섞으면,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멋진 주황색이 펼쳐진다는 사실!
우리 핑크 요정님께 보여주고 싶은 세상도 그런 것이다.
다양한 색이 갖는 조화로운 마법.
그 마법이 펼쳐줄 다채로운 세상.
그런 세상 속에서라면 조금 더 기쁘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Image by garageband from Pixabay]
지금은 온통 분홍으로 도배되어 있지만,
네 인생의 캔버스도 더욱 다채로운 색들로 채워져 나가겠지.
세상에는 아름다운 색들이 참으로 많단다.
아빠가 어릴 적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파란색도 다 같은 파란색이 아니더라고.
여전히 아빠는 다양한 채도와 명도의 파란색들도 좋아해.
맑은 봄날의 하늘색에서, 사파이어색, 코발트블루에 이르기까지 많은 파란색들이 이 세상에 펼쳐져 있어.
앞으로 너도 같은 듯 또 다른 다양한 분홍색들을 발견해 보고 더 많이 좋아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만 더 기억해 주렴.
너라는 존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많은 색들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말이야.
네가 없다면 이 세상의 팔레트가 아무리 화려한 색들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아빠의 캔버스는 결국 무채색이 되고 말 거야.
네 안의 무한한 색들로 앞으로 세상을 넓고 조화롭게 그려나가는 모습을 아빠가 늘 응원하며 지켜볼게.
사랑한다 우리 딸.
[표지그림 출처 : Image by Anrita1705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