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사람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한다." 오디오 가이드에서 흘러나온 저 문장을 듣는 순간, 혹시라도 놓칠까 봐 즉시 폰에다 기록을 해 놓았다. 어떤 사람이었길래, 수십 개의 공식 칭호를 가지고, 유럽 최강대국의 황제로서 60년 넘게 그 자리에 머물렀던 사람이 '주구장창 일하며 살아야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또, 저게 진짜 황제의 침실이 맞나? 저 구석에 붙어 있는 초라한 침대라니. 여기 숙소의 침대보다도 작은 저 1인용 철제침대가 황제가 잠을 자던 곳이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평생 저런 신념을 안고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았던 황제. 잠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본다.
드디어 여행다운 여행을 시작한 하루였다. 물론 어젯밤의 여파로 둥이가 새벽에 깨버려서 간만에 새벽 수유를 했고, 아침에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석회가루를 제거할 방법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베이비 캠으로 둥이를 지켜보며 조심스레 아침에 동네 산책도 해봤고, 이유식도 먹였으며, 이후 먹일 이유식 세트도 일주일치를 확보해서 냉동고에 저장해 놨고, 둥이와 함께 궁전 투어를 갔는데 정말 때마침 투어하는 1시간 동안 잠을 자 주어서 아내와 둘이 제대로 관람을 하고 나오기도 했다. 6개월 아기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나와서 제대로 된 관광을 처음 해본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다만 물가가 생각보다 비싼 탓에 사 먹기만 할 수는 없어서 우리 부부가 먹을 쌀을 사러 아시안 마켓에 들렀고, 여기서 잠시 아내와 투닥거릴 뻔도 했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것도 전혀 투닥거릴 일이 아니었던 것 같고 그저 내가 조금 무심하거나 욕심내거나 했던 것이었다. 아내는 이번에도 무심함에는 관용을, 욕심에는 단호함을 보여주었고 결론적으론 둘 다 적절하게 마무리되었다.
오늘의 포인트 몇 가지. 우선, 여기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걸어 다니며 담배를 피운다. 한국보다 훨씬 심한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길거리 흡연자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것이 그래도 많은 공감대를 얻는 상황임에 반해, 여기서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보였다. 잠깐의 구글링을 통해 찾아본 결과, 자유주의와 개인 공간 존중에 대한 문화가 강하고,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는 문화 자체가 워낙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던 터라 흡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 자체가 우리와 다른 것 같다. 또한 실내 흡연이 금지된 게 2019년이라니 우리보다 거의 5년이나 늦게 시행된 것도 한 이유일 터이다. 여튼, 6개월 아기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담배 연기를 피하느라 또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거부감이 강하게 들었다.
두 번째는 어느 곳에서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보였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상하게 유행하는 그 '러닝 크루'라는 것들과는 좀 달라 보였다. 한때 자전거를 탈 때 떼빙을 정말 극혐 했는데, 이젠 공원에서 달리기마저 떼로 무리 지어 다니며 다른 이들을 방해하고 불쾌감을 주다 보니 속칭 '러닝 크루'라는 것들이 정말 싫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말 많아도 2명이었고, 그마저도 쇤부른 궁전의 넓은 공원에서의 2명이니 누굴 방해할 일도 없고 아주 쾌적해 보였다. 곳곳에 당연하게도 신호등이 많아서 도심 러닝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그래도 우리나라 서울 같은 환경보다는 훨씬 좋은 것 같았다. 600년 넘게 왕가의 수도였던 거리에서의 달리기라니, 이건 좀 부러웠다.
세 번째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극대화이다. 뭔가 담배를 피우는 것도 살짝 이것과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긴 한데 그건 별도로 하고, 우리 둥이의 귀여움에 대한 관심의 표출 양상이 우리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한국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귀여움에 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심지어는 만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실제 일부는 그러기도 했다. 물론, 만지려고 할 때 제지한 적도 있고, 탐탁지 않게 허용해 버렸던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관계지향적이고 집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지방은 자기 '가족' 중심으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배라는 기호식품에 대한 제지가 없는 것도 일부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숙소에 늦게 도착하고 외부 일정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이곳 빈의 하루를 경험한 것은 이틀이 전부이니 앞으로 이 생각들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도 한번 지켜볼만한 것 같다.
어쨋든 오늘은 여행다운 여행을 경험한 하루였다. 저녁에는 둥이를 재우고 나서 아내와 함께 숙소에서 한식을 먹으며 맥주로 건배까지 했으니 뭐,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일정은 하루에 딱 1개를 기준으로 하고, 조금 욕심내면 인근에서 2개까지 처리하는 방식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둥이와 우리 모두의 체력과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더 욕심부리지 않아야 한다.
그간의 며칠을 복기하다 보니, 문득 빈으로 오는 기내에서 둥이를 안고 힘겹게 읽었던 Morning Calm 잡지에 실려있던 Alain de Botton의 에세이가 생각났다. (마침, 집에서 가져온 책들 중에 알랭 드 보통의 책도 있는데!)
우리가 파리를 방문할 때 떠올리기 바쁜 위대한 인물 중 그 누구도 휴가를 즐기기 위해 파리에 가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어쩌다 살게 된 장소에서 글을 쓰고, 생각하고, 또 그렸을 뿐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사물이었다. 일상의 물건이 지닌 아름다움, 인생의 의미 그리고 추억들. 모두 장소 그 자체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파리에서 이틀을 보내며 얻을 수 있는 이상적인 깨달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굳이 파리를 여행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각일지도 모른다. -파리에서 며칠이 주어진다면 -
총 여행 기간은 약 5주. 초반 2주 정도는 나름 이것저것 열심히 계획을 세웠더랬다. 그런데 이제 겨우 3일째 밤이지만, 얻어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는 타이슨의 명언(?)처럼 실제 아기와 같이 여행을 와서 현실을 겪어보니 이건 여행이 아니라 육아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성 슈테판 성당에서 꼭 커다란 감흥을 안 느끼면 어떠한가? 까페 자허에 가서 자허 토르테를 먹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할까. 숙소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며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나의 유전자 절반을 가지고 있는 이 귀여운 아기가 내 옆에 있고, 무심과 욕심을 겸비한 나를 너그러이 안아주는 와이프가 있으니, 남들 다 가는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단체 관광버스의 네비에 찍히는 그곳들이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내일은 저녁에 공연 일정 빼고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동네만 돌아다니기로 했다. 관광객이 넘쳐나는 까페 자허에 가기보다는 빈의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동네에, 숙소 바로 옆에 경찰서와 유치원이 있는 이곳에서 나만의 까페 자허와 자허 토르테를 찾아봐야겠다. 아, 나보다는 아내가 커피를 더 좋아하니 아내 취향에 맞는 것으로 같이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또 우리 둥이의 행복한 미소를 마주해야겠다. 00:22, 기록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