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빈(feat. 아기)
여행은 즐겁다. 음, 그런데 난 여행이 아니잖아? 난 그냥 여기서 육아를 하고 있는 거잖아? 근데 평소에 한국에 있었다면 굳이 하지 않았을 일을 왜 여기서는 시도했을까. 어디선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글을 봤던 것 같은데, 꼭 오늘의 우리 상황을 보고 한 얘기 같다.
아침에 일어났다. 어제 일기예보를 확인했었고, 오늘 비가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진짜 비가 왔다. 엊그제까지는 한 여름이었다. 공원의 잔디는 푸르디푸르렀고,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반팔을 입고 돌아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러다 어제는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술사 박물관을 갈 때는 약간 두터운 긴팔 티를 입었고, 아내는 저녁에 빈필 공연을 갈 때 가디건을 걸쳐 입고 갔다. 그러다 오늘은 갑자기 초겨울 날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 비가 와서 체감 온도는 더 떨어진 것 같다.
단기간 여행이었다면, 비 따위 상관 안 했을 것이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많은 것을 보고 가야겠다는 욕심이 더 앞섰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무리를 했을까. 둥이 첫 수유를 하고, 이유식을 먹이고, 이제 오늘 하루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다양한 미술관들 중에 하나를 가 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냥 쉬기에는 그냥 조금 아쉬웠다. 남은 기간은 많지만, 그래도 그냥 집에만, 집 근처에만 있을까 생각하니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 같고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아 못내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최대한 교통수단을 편하게 타고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해서 오늘은 알베르티나 미술관ALBERTINA Museum Wien을 다녀오기로 했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59A를 타고 쭉 가서 종점에서 내리고 걸어간다. 집 앞 버스 정류장은 도보로 1분 컷. 종점에서 알베르티나 까지는 구글지도상 대략 10분 이내. 이 정도면 충분히 갈만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갈 준비를 하던 중에 유모차 방풍 커버를 가져오지 않을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 때는 방풍커버가 필수품이다. 아무리 블랭킷을 덮어서 바람을 가로막아도 아기가 외부의 찬 기운을 직접 맞닥뜨리는 것을 다 막을 순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한 사람이 둥이를 아기띠로 안고 가고 한 사람은 유모차를 들고 이동하기로 했다. 아기띠는 힙시트가 있는 버전이어서, 둥이를 앉히고 띠를 하고, 블랭킷으로 덮고, 마지막으로 좀 커다란 쟈켓을 감싸버리면 따듯하고 안전하게 둥이를 이동시킬 수가 있다.
다만, 유모차는 '커버'도 챙겨 오지 않았기에 그냥 들기도 쉽지가 않다. 물론 옆구리에 들 수 있는 손잡이는 있지만 어깨에 메는 '무중력 밴드'는 없는 버전이어서 임시방편으로 커다란 플라스틱백에 유모차를 집어넣고 기다란 손잡이 끈을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가지고 이동하기로 한다. 생각보다 고정은 잘 되었지만 무거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무거운 유모차는 당연히 내가 들어야 한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어깨에 맨 유모차를 붙잡고 이동한다. 아내는 둥이를 아기띠에 메고 몇 겹으로 감싸서 안전하게 모신다. 버스를 타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내려서 이동하면서부터 이거 이거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비가 꽤 온 탓에 운동화는 젖어가고 어깨는 아파온다. 그래도 둥이는 큰 문제없이 이동이 가능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도착한다. 도착한 시각은 12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수요일 오전이었기에 사람이 많지 않겠거니 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비가 와서 오히려 실내 관람객이 더 많아진 것이다. 미술관 내부는 생각보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분데스뮤지엄카드가 있기에 이곳 또한 별도의 티켓 구매 과정 없이 바로 들어간 것은 편리한 점이었으나, 들어가자마자 피곤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게다가 이곳은 미술사박물관처럼 '미술관'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었기에, 미술 관람에 최적화된 구조와 동선이 아니었다. 미술사 박물관은 곳곳에 소파가 있어 편히 관람하거나 쉴 수 있는데 이곳은 내부 전시공간은 좌식 공간이 없었고 입식으로 모두 서서 관람을 해야 했다. 또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이 워낙 많이 몰려 유모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다. 게다가 생각보다 둥이가 보채는 상황이 많아져서 조금 보다가 겨우 바깥 복도로 나왔다. 그래도 모네, 세잔, 피카소, 르누아르 등 19~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대충은 훑을 수가 있었다. 또, 인터랙티브 어플이 재미난 게 있었는데, 작품 밑에 QR코드를 스캔하고 카메라를 작품으로 향하면, 실제 그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증강현실로 나타나는 볼 수 있었다. 이런 기술이 적용된 작품들이 꽤 있었는데 몇 개 밖에 못해봤지만 재미난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와서 둥이의 기저귀를 갈고, 아내가 나보고 조금이라도 더 보고 오라고 해서 후딱 2층에 나머지 공간을 한 바퀴 돌고 나왔다.
마음이 급하고 불안해서 종종걸음으로 보다 나왔다. 그렇게 복도 의자에 아내와 앉아 있는데, 이젠 또 배가 고프다. 꼬르륵 꼬르륵. 아침을 씨리얼과 우유로 적당히 때우고 나왔더니 배가 고프고 힘이 빠진다. 급하게 구글지도에 저장해 놓은 식당 목록들을 검색해 보는데, 애매하게 브레이크 타임에 걸린다. 거기다 둥이 분유 시간도 애매하게 다가온다. 안 되겠다, 집으로 가서 둥이 분유 수유부터 하고 집 근처에 식당으로 가자, 하고 서둘러 미술관을 빠져나온다. 그래도 무제한 출입 카드가 있기에 아쉬움 없이 발걸음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 카드가 없었다며 입장료 아까워서라도 지친 몸을 이끌고 계속 돌아다녔을 터. 새삼 미리 요놈을 구매한 나 자신을 칭찬한다.
그렇게 집에 오고 나니 온몸이 쑤시는 것 같다. 아내도 마찬가지. 서둘러 둥이 수유를 하고 이젠 우리들 주린 배를 채우러 집을 나선다. 구글지도 평점 4.7인 아시안 식당이 보인다. 우산을 쓰고 둥이를 안고 얼른 맛난 밥을 먹을 기대에 차서 서둘러 식당으로 가는데, 가자마자 브레이크 타임이라며 "Take out only!"라고 종업원이 외친다. 아따 이놈, 성질 급하네. 그래 그래도 냄새가 맛있는 것 같아. 얼른 주문해서 가자하고 카운터로 가니 떡하니 "Casy only"라고 쓰여있다. 카드 안되냐고 물었더니, 또 "No, Cash only!"라고 매몰차게 답한다. 이 수식어들은 내 감정이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좀 그랬다. 이 정도 매너에 이 정도 평점이면 진짜 맛난 가게일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집 앞에 일식가게가 있는 게 생각나 거기로 향한다. 다행히 진짜 일본인 직원이 친절하게 어색한 영어로 우리를 맞이한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까 아시안 식당은 중국인스러운 직원이 쌀쌀맞은 영어로 우리를 대했는데, 일본인의 어색한 영어를 접하니 오히려 안도감이 들며 긴장이 풀어진다. 따듯한 해산물 국수와 불고기 롤, 그리고 새우 팟타이를 시킨다. 정통 스타일은 아닌데, 국물도 롤도, 팟타이도 다 맛있다. 둥이도 다행히 많이 울지 않고 우리를 기다려준다. 주린 배를 행복하게 채우고 나니 살짝 에너지가 회복되는 듯해서, 집 근처 평점 좋은 커피숍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실까 하고 다시 의기투합한다.
Coffee Junkie로 향한다. 그런데 식당을 나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둥이가 또 울기 시작한다. 그것도 꽤나 강성울음이다. 둥이도 비 오는 날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해졌나 보다. 맞어,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쪼그만 애기가 어찌 괜찮을꼬. 미안하다 둥이야. 나는 울고 있는 둥이를 안고 카페 바깥을 서성이고 아내는 테이크아웃으로 두 잔을 들고 온다. 그런데 서두르다 보니 뚜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다시 갈 시간도 없어 찰랑거리는 뜨거운 커피를 각자 한 손에 들고, 한 손엔 우산을 쓰고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갓 지난 시각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가 무척이나 길었다. 그렇게 힘들게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이제 비 올 때는 나가지 말자, 아니 '나가게 되면 한 명은 집에서 둥이랑 쉬고 한 명만 나갔다 와서 교대하자'라고 계획을 수정한다. 잊지 말자, 우리는 여행이 아니라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여행이 아니기에 급하게 서둘지 말고, 여유를 찾자. 비 오는 날은 집에서 차분히 둥이와 놀거나, 집 앞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는 것으로도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비가 얼마나 올지 모르지만, 부디 남은 기간 동안은 여유를 되찾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