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2020
역병이 돌기 시작하고 뉴욕은 상황이 심각해져 필수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자택근무가 강제되었다. 이를 영화에서만 보던 지구가 멸망하기 시작한 첫째 날 같은 걸로 해석한 나는 H에게 다시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했다. 헤어진 지 일 년이 좀 안 되는 시점이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살림을 차렸다. 원래 학교였다는 이스트 할렘의 6층짜리 오래된 Prewar 건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을 이렇게 부른다.) 그걸 어떤 한국 사람이 사서 아파트로 직접 바꿨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바닥과 벽이 맞닿는 부분이 삐뚤빼뚤하고 방문도 표준 규격과는 다 조금씩 엇나간 크기였다. 그게 매력인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아파트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보석 같은 요소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뒤뜰이었다. 더럽고 바글거리는 도시 한가운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사적인 바깥공간이 있다는 건 굉장한 사치였다. 이 정원을 그는 아주 잘 활용했다. 그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음악을 바운스 해서 핸드폰에 넣은 뒤 이어폰과 모자를 쓰고 나 다녀올게, 하고 문을 나서곤 했다. 가끔 금방 들어오기도 했지만 줄담배를 피우면서 듣고 또 듣고 왔다 갔다 정원을 누비며 한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 긴 시간 동안 도대체 뭐를 하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를 염탐했다. 그러면 그는 십중팔구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어슬렁거리며 본인이 만든 음악을 검사하고 있었다. 이메일을 쓰거나 통화를 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쓸쓸해져 어서 들어오라고 문자를 보내면 그는 너도 내려와! 하며 나를 회유하지만, 무기력과 결벽에 익숙해진 나는 매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전에 같이 살 때와는 다르게 외딴섬에 단 둘이 남겨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서너 달 동안 서로 이외에는 아무도 물리적으로 만난 적이 없으니 실제로 외딴섬이었다. 이 외딴섬에서 나는 여전히 우울증이라고밖에 객관적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내 안의 무서운 괴물들과 매일 같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다가 결국엔 잠도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해가 떴다고 정해진 시간에 갈 곳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죄책감에 휩싸인 채 대낮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심장이 덜컹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정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데드라인을 코앞에 두고 절벽 앞에 선 기분으로 정원에 나갔다. 노트북과 몸에 뿌리는 모기약, 손 소독제 등 자잘한 물건들이 가득한 가방, 그리고 그가 만들어 준 술을 든 내 모양새는 마치 3박 4일 여행을 준비해 가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는 우스울 만큼 너무나도 쉽게, 그렇게 질질 끌고 있던 글을 끝냈다. 2층 우리 집 와이파이가 여기서도 쌩쌩하게 잡혀 그대로 이메일을 보내 버렸다. 보내고 머리와 마음이 텅 비어버린 나는 정원에 앉아 생각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사진가 크레딧: Jorge Garcia, @photosbyjorge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