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말의 부재'가 만드는 거리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라는 건,
아마도 관계에 대한 가장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착각일 것이다.
오래 알고 지낸 가족, 연인, 친구 사이일수록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주는 편안함이 있지만,
그만큼 오해의 씨앗도 자라난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내가 힘든 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표정만 보면 알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는 건 배려라고 믿었고,
그 침묵마저 친밀함의 증거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내 마음은 전해지지 않았고,
상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관계가 멀어지는 건 거창한 사건 때문이 아니다.
작은 오해들이 쌓이고,
그 오해를 풀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를 때
서로의 마음은 조금씩 닿지 않게 된다.
말하지 않는 선택은 때로 관계를 지키기보다
관계를 무너뜨리는 시작이 된다.
왜 우리는 말을 아끼게 될까.
혹시 내가 꺼낸 말이 부정당하거나
가볍게 여겨질까 두려워서다.
혹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상대에겐 없는 의무다.
그리고 그 의무가 지켜지지 않으면, 실망이 남는다.
말하지 않는 관계가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일종의 게으름일 수 있다.
상대가 내 마음을 읽어줄 거라는 전제 위에
소통을 미루는 습관이 자리 잡는다.
결국 그 침묵이 서로의 마음을 멀리 놓아버린다.
사람의 마음은 말로 꺼내야 비로소 닿는다.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도
그날의 기분, 상황, 마음은 매번 다르다.
어제 통했던 침묵이 오늘은 벽이 될 수 있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의 오늘을 알 수 없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불완전한 말이라도,
서툰 표현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전하려는 마음 그 자체였다.
그 한마디가 관계의 온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말을 꺼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침묵이 주는 안정감보다
대화를 통한 불편함이
관계를 훨씬 건강하게 만든다.
상대가 다르게 느낀다면,
그 차이를 마주하는 것도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진짜 가까운 사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가 아니라
말해도 괜찮은 사이다.
오히려 말해야만 알 수 있다는 걸 인정할 때
우리는 더 깊이 연결된다.
이제 나는 안다.
관계는 침묵 속에서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말을 건네고, 마음을 전하고,
때로는 오해를 풀고 다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드러낼 때,
우리는 비로소 ‘가까운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