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지역과 화상으로 참여해야 하는 위원회가 있었다. 덕분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늦은 밤으로 회의 시간이 정해졌다. 윗분들을 모시고 참여해야 하는 회의라, 빠질 수도 없었다.
밤 9시에 시작하니 얼추 11시 전에는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럼 정리하고, 11시에 집으로 출발해야지.
11시 반. 예상보다 말들이 많아 회의가 길어졌다.
이준이는 잠들었겠지?
잘 때까지 혼자 이준이의 비위를 맞춰주고 케어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리곤 오늘은 이준이가 잘 때 출근해서 잘 때 퇴근하는, 자는 이준이 얼굴만 봐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출퇴근 버스로는 길이 막혀 40분은 족히 걸리던 거리가 지금 이 시간에는 15분이다. 늦은 시간인만큼 도로에 차는 내가 탄 택시뿐이다.
"저기 횡단보도에서 세워주세요."
집에 1분이라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 네비 상 찍히는 정문 대신 후문 근처에 내려달라고 한다. 분주한 마음으로 빠른 걸음을 옮긴다.
삑삑삑-
이준이가 혹시 자는데 깰까, 조심스럽게 현관 번호를 열고 들어간다.
"엄마 왔어? 엄마 소리야."
불 꺼진 거실 한 구석, 안방 쪽에서 이 시간이면 분명 잠들었다고 생각한 이준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랑 놀 거야."
이내 이준이가 안방 문을 열고 달려 나와 나를 꼬옥 안아준다.
"엄마 보고 싶었어?"
"응"
"얼마나?"
"마-니!"
이준이를 재우려고 10시부터 온 집안에 불이란 불은 다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남편의 탄식이 이어진다. 일이 바쁜데도 내가 야근을 해야 하는 날이면 만사 제치고 칼퇴하여 독박육아를 해주는 남편에게는 늘 미안하고 고맙다.
"나는 엄마야. 엄마는 이두니야. 엄마가, '비타민 비타민' 해."
오전에 어지럼증 때문에 병원엘 갔다가 약국에서 참지 못하고 그만 뽀로로 장난감이 든 아기 비타민을 사버렸다. (유아 비타민에는 영양만큼 당분도 많다는 어느 육아 인플루언서의 글을 보았지만 자꾸 사주게 된다.) 이준이에게 주니, 본인이 엄마 역할을 할 테니, 나보고 '비타민을 달라고 조르는 이준이' 역할을 맡으란다. 비타민도 이준이 손에서는 놀잇감으로 재탄생한다.
내일 아침 일찍 또 출근해야 하지만 이준이가 안 자고 있었던 것이 마치 엄마를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 같아 고된 하루의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밤 12시, 아닌 밤 중에 홍두깨가 아닌, 피곤하지만 행복한 아닌 밤 중 육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