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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랏말싸미 Feb 15. 2024

열다섯 번째 장은 거룩한 소명 의식입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2024년이 어느덧 한 달 보름이 지났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엊그제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들으면서 새해를 맞이한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10대는 10킬로미터, 20대는 20킬로미터, 30대는 30킬로미터의 속도로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고 하지요? 저는 50킬로미터의 속도로 세월의 흐름을 느끼니 한 달 보름을 엊그제 같다고 느끼는 것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책장 지기는 구내염으로 요즘 음식 섭취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시댁 방문하느라 장시간 운전한 것도 아니고, 명절 음식 준비로 고생한 것도 아닌데 입병이 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오늘이 입병의 절정기인지 물만 먹어도 짜릿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입병 핑계를 대면서 어제부터 죽을 먹고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오만가지 생색은 덤으로 내고 있습니다. 입병을 핑계 삼아 오늘은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연한 아이스 연유 라테를 준비했습니다. 물만 먹어도 아프다면서 하루쯤 커피를 포기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어처구니없지요? 짜릿짜릿한 아픔을 느끼면서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 조금만 아픔에도 생난리를 치는 제 모습을 보니 이육사 시인이 떠오릅니다. 이육사 시인의 이름만 떠올렸는데도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집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이육사. '절정'


  이육사 시인은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17번이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투쟁하는 길은,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자신의 길일 것입니다. 그 과정은 극도의 긴장의 연속이었겠지요. 그래서 '절정'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일제의 옥죄임에 몰려 더 나아갈 수 없는, 그렇다고 굴복할 수 없는 투사의 '극한 상황'이라고 새겨봅니다. 하지만 시인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극복해 나가는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이육사 시인의 본명은 이원록이며, 이원삼이란 이름도 사용하셨습니다. 이후 문필활동을 할 때, 이활을 주로 필명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이, 1927년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실 때,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은 많이 아실 겁니다. 1927년 일본 경찰이 장진홍 의거(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범인을 잡지 못하자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육사 시인을 비롯 시인의 4형제도 검거되었습니다. 그때 투옥된 시인의 수인번호가 264였던 것이지요. 시인은 그 당시 고문당한 기억을 잊지 않고자 이육사(李陸史)로 불리길 원했다고 합니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의지는 이육사 시인의 따님인 이옥비 여사님의 인터뷰에도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께서 제 어머니 안일양을 보지 않겠다 말한 적이 있어요. 이는 아버지와 정치군사간부학교의 1기생 동기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동기들의 이름을 자백했기 때문이지요. 저희 아버지처럼 강철 같으신 분은 그 고문을 이겨내셨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께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안병철의 자백에 크게 노한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장인에게 어머니를 자신의 아내로 같이 살 수 없다는 여덟 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답니다. 집에 들러 양친에게 인사를 드릴 때에도 집에서는 식사만 하시고, 밤에는 밖으로 나와 주무셨어요. 그렇기에 제 어머니는 이런 상황 속에서 수치를 참지 못하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하셨다고 해요. 그때 어머니께 힘이 되신 것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애였어요. 특히 할머니께서는 며느리인 어머니에게 ‘너는 내 딸이다’라며 각별하게 다독여주셨어요. 그 덕분에 아버지도 마음이 풀려 제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오신 적이 있으신지요? 서대문형무소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가슴 아픈 삶과 우리나라의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남녀노소의 독립운동가 사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찬찬히 그분들과 눈을 맞추면서 마음에 담다 보면 그분들의 삶이 보입니다. 그분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단 한 번뿐인 인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나라를 위해, 독립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내던지셨습니다. 그 희생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육사 시인의 사진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의 지친 얼굴과 슬퍼 보이는 눈빛에서 얼마나 힘든 고문을 당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이육사 시인의 시를 가르칠 때 시험에 담을 수 없는 그의 생애에 열변을 토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꼭 서대문형무소에 가보길 당부합니다. 최소한 그것이 후손인 우리가 할 도리가 아닐까요?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하에는 취조실과 임시구금실이 있습니다. 거꾸로 매달려 물고문당하는 모습, 대못 상자, 벽관 등 고문 도구들이 보입니다. 겨우 입에 난 구내염으로도 이렇게 아파하는 책장 지기로서는 그 모진 고문에도 꿋꿋하게 독립운동의 길을 전진해 가신 이육사 시인이 한없이 거룩하시고, 위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가 뭐가 있을까요? 17번의 수감 생활을 견딜 수 있으신 것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믿으셨기 때문일까요? 그는 ‘백마 타고 초인’에 의해 독립을 맞이할 조국을 위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셨을 것입니다. 이육사 시인과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으로 지금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 우리의 소중하고, 위대한 대한민국을 더욱 잘 가꾸어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그게 거룩한 그분들의 소명 의식에 대한 우리의 책임일 것입니다. 오늘은 이육사 시인의 ‘광야’를 마지막으로 책장을 덮겠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날릴 때에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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