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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랏말싸미 Feb 22. 2024

열여섯 번째 장은 첫사랑입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24 절기 중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가 지났습니다. 흔히 양력 3월에 꽃샘추위라 하여 매서운 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이미 우수 무렵이면 날씨가 많이 풀리고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튼다고 합니다. 우수는 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된다는 날이니, 곧 날씨가 풀린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우수·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라는 말도 생겨났나 봅니다. 아직은 겨울 추위가 남아 있지만, 머지않아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오리라는 설렘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설렘을 안고 ‘첫사랑’을 주제로 책장을 펼치겠습니다. 가이벨이 ‘첫사랑이 엮어내는 꿈이 단 것은 나무에 피는 꽃보다는 더 빨리 시들고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첫사랑의 달콤함을 혹평했지만, 책장 지기는 첫사랑의 설렘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첫사랑을 얘기할 때는 달콤한 커피가 어울리겠지요? 오늘은 고소한 커피에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듬뿍 들어간 아인슈페너를 준비해서 여러분을 만나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듬뿍 넣어서 커피의 고소함보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먼저 느껴집니다. 오늘은 커피처럼 달콤한 예이츠의 ‘첫사랑’을 낭송해 보겠습니다. 


비록 떠가는 달처럼 
미의 잔인한 종족 속에 키워졌지만,
그녀는 한동안 걷고 잠깐은 얼굴 붉히며
내가 다니는 길에 서 있다.
그녀의 몸이 살과 피로 된 심장을
갖고 있다고 내가 생각할 때까지

허나 나 그 위에 손을 얹어
차가운 마음을 발견한 이래
많은 것을 기도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매번 뻗치는 손은 제정신 아니어서
달 위를 움직이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웃었고, 그건 나를 변모시켜
얼간이로 만들었고,
여기저기를 어정거린다.
달이 사라진 뒤의
별들의 천공운행(天空運行) 보다 더
텅 빈 머리로


  이 시는 사랑에 사로잡힌 영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미소는 화자의 판가름하는 능력을 중지시키고 저하시키면서 덜된 사람처럼 방향 없이 걷게 만듭니다. 시에서 사랑은 ‘달’로 비유됩니다. 그러나 달은 천체를 일정한 궤도로 운행하는 달이 아니라 지상에서 올려 볼 때 지나가 버리는, 떠가는 달입니다.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어리석고 미숙해지지만, 사랑이 종료되었을 때 우리는 공허를 맛보게 된다고 예이츠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첫사랑’은 어떠셨나요? 저의 첫사랑은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1980-90년대 교육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비인간적이었습니다. 교육을 가르치는 공간에 ‘교육’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신설 학교이면서 지역 명문고등학교를 목표로 오직 성적으로 학생을 가르는 학교였습니다. 반 배정을 성적이 우수한 반과 성적이 열등한 반으로 했을 정도였습니다. 공공연하게 우열반 사이에 차별이 존재했고요. 성적이 우수한 반에 들지 못한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열등감을 느껴야 했고, 성적이 우수한 반에 배정된 학생들도 그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습니다. 전교 30등까지 주는 성적 장학금을 받았던 책장 지기도 3년 내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저의 존재가 티끌만도 못하게 느껴지고, 하루 24시간이 전부 벅찼습니다. 정말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 몇몇 선생님들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숨 쉬는 공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순간이 왔습니다. 등굣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 환하게 저를 보고 웃고 있으신 국어 선생님이 있으셨습니다. 성적만을 추구하기보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위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라고 훈화해 주시고, 결과보다 과정의 중요성을 인지시켜 주셨던 선생님이셨습니다. 힘든 날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것이 그때 저의 유일한 탈출구였지요. 그런데 저와 같은 학생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제 이름을 알고 있으시다는 것 자체가 제가 의미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놀라 인사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저에게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말을 전하셨습니다. 


  “편지 써 놓았으니 점심시간에 교무실에 잠시 들를래?”

  “... 네?... 네.”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유난히 맑고, 상쾌했던 그날 아침 등굣길은 행복했던 저의 기억이 만들어낸 착각일 수 있습니다. 어둡고, 깜깜하기만 했던 제 삶이 그날, 그 순간 기적의 모세처럼 환하게 밝아졌으니까요.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고 스스로 경멸했는데, 선생님께서 제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왠지 제가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성적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열등감을 느꼈지만,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국어 선생님과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단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 힘으로 3년을 견디었습니다. 저에게 첫사랑은 힘든 순간에 견딜 수 있는 한 줄기 빛과 생명수였습니다. 제가 국어 선생님이 되고,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날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날 선생님께서 불러 준 제 이름의 소중함에 대해. 너무 감사하게 선생님께서도 그날을 기억하셨습니다. 


 “첫 수업 때부터 넌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학생이었어. 큰 눈으로 수업에 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면서 열심히 수업 듣는 모습이 참 예뻤어. 그런데 점점 네가 지쳐가는 것이 보이더라.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랬지. 그래서 아이들에게 답장하기 시작했어. 네게도 편지를 썼고. 그런데 마침 그날 아침에 네가 내 앞을 걸어갔어. 걸어가는데 힘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그래서 널 불렀지. 그게 네게 큰 힘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선생님께서 제 첫사랑인 거 아세요? 힘들 때마다 선생님께서 써 주신 편지를 보면서 견디었어요. 선생님과 같은 교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어요.”

  “너처럼 말하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정말 그 시절 국어 선생님은 우리의 첫사랑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함께 아파해주셨던 선생님. 그런 분이 저의 첫사랑이었기에 그 시절을 잘 견디고,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첫사랑은 한순간에 다가와 인생을 바꿔주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첫사랑이 아픔으로 기억될지언정 그 아픔은 새살을 돋기 위한 상처일 겁니다. 오늘은 고재종 시인의 ‘첫사랑’을 음미하면서 책장을 덮겠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 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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