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알 같은 촘촘한 눈송이가 자박하게 깃든 어느 바닥을, 심박이 으스러져라 굴러대던 적이 있었다. 내 어린 날의 그리움이 박혀있는 유년의 언덕. 그곳에서 나는 온갖 세상의 희로애락을 맛보았다. 꼬까옷을 두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가 하면, 털썩 주저앉아 구멍 뚫린 하늘과 눈싸움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콩알 만 한 내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언덕은, 위화감보다는 그 시절을 사랑하게 해 준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두도 못 내었을 일이다. 당장 눈이나 비가 온다는 기상 예보라도 뜬다면, 묻어있을 미끄러움을 걱정하느라, 오르내리며 괴로울 육신을 아끼느라, 밤을 꼴딱 지새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따금씩 어슴푸레한 지난날의 그곳을 떠올리다가 그리움에 젖어드는 일이 잦았다. 떠나지 못하고 잊혀진 소풍이 나를 깨워대는 것 같았다. 언덕은 비단 나 혼자만의 추억이 깃든 곳은 아니었다. 여럿의 일생을 끌어안고서, 아둔한 나를 타이르며 잠든 시간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높은 언덕 위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아련한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할아버지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꽤 오래되었다. 몇 살인지도 기억나지 않던 때. 누군가의 부재 소식이 슬퍼서라기보다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어른들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따라 울음 짓곤 하였다. 내가 다 크고 난 뒤에도, 없는 추억 때문인지 크게 아리지 않았다. 몇 번의 보름달을 떠나보내고 제법 의젓해진 어느 날,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네가 어릴 때, 빨간색 잠바를 입고 할아버지를 자주 보러 갔었어.”
신기하게도 그다음부터, 전혀 일면식이 없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분이 살아계셨던 때라면, 우리 가족은 언덕 아래 집에 머물고 있었으리라. 시기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눈앞으로 작은 꼬마 아이가 빨간 털외투를 입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종종걸음이 어찌나 다부진지, 놓칠 새라 옹골차게 좇다 보니 익숙한 은색 철문 앞에 다다랐다.
잔뜩 휘어지는 고운 눈매, 깊이 파인 부드러운 입동굴, 다가가면 베일 것 같은 오뚝한 코. 아이의 시야에 들어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겉모양은 참으로 인자해서, 선량함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장면들은 소름 끼칠 만큼 생경하면서도 선명했다. 실재하는 기억인지, 만들어 낸 환상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소박한 발길이 닿은 곳을 두리번거리자, 그는 이미 주변의 친구들과 막걸리 몇 잔을 들은 채, 분위기에 거나하게 심취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좋아하는 주종도 막걸리다. 그는 진짜로 내 할아버지가 맞을지도 몰랐다. 지긋한 일터에서 밝은 솜털을 만난 그의 얼굴은, 어여쁜 꽃밭에 앉아있는 것처럼 금세 해사해졌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투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어쩌면 자신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그에게는 만물의 기지개 같은 일이었음을.
눈을 잠깐 깜빡이자 장면이 전환되었다. 둘은 아까의 언덕을 함께 내려가고 있었다. 손을 잡고 있었고, 소복하게 눈 쌓인 언덕은 줄곧 하얀빛을 뿜어댔다. 조심, 조심해야 해. 그는 투박한 말투로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손녀의 배고픔을 훑어주고, 고단함을 알아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취객으로 보일지 몰라도,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는 이 옅은 아이에게만은, 꼿꼿하고 또렷한 사람이고 싶었다.
아이는 그 순간을 만끽했다. 살아생전 맛본 적 없는 얼큰하고도 취기 어린, 찬탄 같은 사랑을 온몸으로 떠안는 기분을. 곧이어 자신의 내면에다 희어진 언덕을 그려 넣었다. 오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언덕은 지워지려 할 때마다 기억해 내려고 자꾸만 그림을 덧대어 나갔다. 훗날이면 만나지 못할 소중한 기억임을 직감한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움켜쥐었다. 왠지 놓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겨울바람이 철썩이며 매섭게 옷깃을 가로챘다. 바다도 아닌 게, 넓은 물인 척하는 꼴이 우스웠다. 미끄러지는 어깨너머로 다부진 사랑이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흙이 묻어 버석해진 포대자루 하나를 들고 오더니, 위에 묻은 먼지를 툭툭 씩씩하게 털어냈다. 이내 몸체만 한 짐을 엎어 들고는, 남산 같은 어깨 위로 한 걸음씩 발을 떼어 나갔다. 몇 번이고 미끄러진대도 오르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의 옆에는 여전히 그가 서있었다.
눈이 예사롭지 않도록 펑펑 쏟아지던 날. 글자의 꼬투리가 지워질락 말락 하던 투박한 포대자루는, 제 아픔은 상관없다는 듯이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머나먼 우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썰매는 총명한 빛깔을 띄었다. 이를 멀리서 바라보던 다른 아이는 어두운 몸을 이끌고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모두가 떠나고 그곳엔 이제 나 혼자였다.
가끔 그 언덕을 떠올릴 때면, 없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들이닥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기억에 아파해야 하는 건 생각보다 슬픈 일이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으나, 부르기도 전에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언덕 위에서 뒹굴며 놀던 소꿉친구도, 몇 인분의 삶과 동고동락했던 낡은 집도, 여전히 나를 꼬마로 기억할 영원한 내 할아버지도. 잠시 눈 감으면, 비눗방울처럼 불어났다 터졌다 했다.
사랑하고 있음에도 붙잡지 못하는 것들이 난무해서, 차라리 단념하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그들 또한 나를 잊고 싶어 잊은 게 아니라, 잊지 않으면 살지 못해서, 살기 위하여 놓아주기로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리저리 엉켜있는 유년의 기억을 되짚노라면, 서글픈 어지러움에 몸이 불규칙적으로 뒤틀렸다.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의 나는, 지나간 당신을 붙잡기 위하여 영겁의 시간을 건너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