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밖에서 만나면 우리 사귈까요

그런데,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이죠.

by 블루나잇

까슬까슬한 검은 사포 위에, 자동차 한 대만 덩그러니 끼워진 느낌. 그 주변의 것들은 모두 제거된다. 심지어 배경이었던 검은색 사포마저 하얀색 연기를 껴입은 듯 뭉텅뭉텅 벗겨지고. 남은 건 빨간색 자동차. 그리고 안에 있는 그 사람과 나. 단둘뿐.

“당신은 누구예요?”


내가 물었다. 웅얼거리는 그의 입 모양이 눈에 담겼지만 말의 형체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내 그 자리의 얼굴이 바뀐다. 정확히는, 사람이 바뀐 거다. 나는 또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예요?” 그러고는 얼굴 없는 얼굴들과 몇 차례 반복되는 질문을 이어갔다. 연신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들은 예전에 본 적 있을지도 모를 회사 타 부서의 동료였다가, 언젠가 옆 테이블에서 우연히 밥을 먹었던 동네 청년이었다가, 전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였다가 한다. 이윽고 질문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을 땐, 그의 모습이 명확히 굳어진 뒤였다. 나는 긴장감이 조금 풀린 나머지, 의심을 거둔 눈꺼풀로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이젠 안 바뀌네요.”


“방금까지 계속 바뀌었거든요.”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탄을 터트리는데도, 바라보기만 하다 곧 사라져 버릴 어렴풋한 미소로 화답하는 것. 그는 그게 다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말을 이어갈 동력을 얻었다는 듯이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내 물음표들은 스스로 끊어질 생각을 잊고 만다. 환희 가득한 표정. 언어도 표정도 각기 다른 타지에서 같은 처지의 여행자를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근데 지금, 꿈속인 것 같지 않아요?” 나의 질문이었다. “꿈 밖에서 만나면 되게 신기할 것 같죠.” 이것도 내가 넌지시 흘린 쉼표의 말.

“꿈 밖에서 만나면 우리 사귈까요?”


그리고 이건, 옅은 입꼬리에 매달아 그가 내게 보낸 말이었다. 도파민이 잔뜩 묻어나는 한 마디에 나는 기를 쓰고 그의 얼굴을 찾아내려 애쓴다. 누굴까. 누구였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그에겐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꿈에 그리던 내 이상형도 아니다. 그냥... 음, ‘평범함’ 세 글자로 표현이 가능한 사람. 그러나 더 이상 나에게 평범하지만은 않아질 사람.


팍팍한 삶에서 변주곡이라도 만난 듯이, 나는 그와의 관계에 색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의식 속에 잠식되는 기분이 이런 걸까. 푸른 새벽 숲이 노래하는 풍경을 두고, 미지근한 물에 우주 빛깔 입욕제를 푸는 것처럼. 작은 호수 위를 껴안은 조각배를 연상시키는 그와의 시간. 차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한다. 운전대를 쥐면서도 고개는 나를 향해있는 그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구불구불 험한 산길 위를 경주마처럼 오르던 그가, 마침내 갓길에 차를 대었고 우리 둘은 함께 내렸다. 어쩐지 기이한 설렘이 담긴 얼굴로. 그리고 잠시 기억나질 않다가 정신이 들었을 때, 눈앞에 보인 장면은 어느 정상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먼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아래에서 공연을 하나 봐요, 같이 구경할까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거 전부 같이하고 싶어요. 라는 조금은 쉬워 보일 법한 분홍빛을 마음에 가두고, 그가 바라보는 곳에 시선을 던져보았다. 온갖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이들이 모여 밴드 공연을 하는 듯한데, 이상하리만치 거리가 멀다. 기존 공연장의 무대와 객석 간의 간격으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마치 하늘에서 인간세계의 삶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때의 나는 엇에 취했던 걸까. 춘 시간 속에서 그렇게, 내가 나인지 당신이 나인지도 모르는 채로 온도를 주고받 마법 같은 순간 펼쳐지는데. 기쁨도 잠시, 어떤 이가 갑자기 내 몸을 아래로 확 잡아끈다.


예상치 못한 장면이지만 마치 이런 상황을 백 번이라도 연습한 사람처럼, 단단한 두 다리와 정신력으로 위기 모면에 성공한 나. 그렇다면 다음 타자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그는 당연한 결말이라는 듯, 주유소의 힘없는 풍선마냥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해 버린다. 그는 이제 여기에 없고, 나 또한 그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내 모습. 행복은 의심하는 순간 깨져버는 것. 그렇다면 이 행복은 애초에 없었던 행복인 걸까. 아니면 내가 망친 행복인 걸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분명히 알고 있는 공간, 누워있는 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과의 일을 그저 허상이라고 치부하고 싶지 않았던, 여기까지가 그 사람과 만난 내 꿈의 전말. 내가 단지 정신 나간 소리를 늘어놓았다고 생각했다면, 잘 들어주길 바란다. 꿈은 현실과 이어지는 중간 다리로, 꿈을 통해 현실의 삶을 돌아볼 수 있고 또, 끔찍하리만치 생생한 꿈은 하루 일과에 어마어마한 지장을 주므로... (저는 진지하단 말이에요)


나는 한동안 내가 구하지 못하고 미처 거기에 그대로 두고 와 버린 남자를 문득 떠올렸다. 우리의 마지막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처연한 표정의 신발 한쪽까지. 가끔은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였을까 생각해 본다. 아주 만약 그를 다시 만난다면, 도망친 게 아니라 경황이 없었다는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할 심산으로. 그리고 그 뒤에 숨긴 진정으로 내비치고 싶은 속마음은 결국 이거겠지.


“그래서,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안 잊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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