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눈사람은 인간을 사랑했다. 섬세한 손길로 자신을 정성스레 빚어낸 조물주를. 아버지 어머니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심정으로 사랑했다. 마음과 마음의 끝에 간신히 매달린 슬픔의 언약을 사랑한 적도 있었다. 나를 만들어 준 사람. 나와는 다른 사람. 가까워지고 싶지만 내겐 너무나 먼 사람.
그날 밤, 그러니까 자신이 이 땅에 탄생하게 된 순간부터는 대지의 문지기가 되어 오직 하나의 인간을 바라보게 되었다. 포근한 손은 자신을 결코 해하지 않음을 알아서, 다시 태어날 때 들고 온 심장의 반원을 굴리며 애틋함을 펑펑 쏟아내던 날. 찰칵 하고 네모난 기계를 몇 번 손쉽게 다루더니 자신의 곁을 매몰차게 떠나버린 이름 모를 새벽녘. 점점 녹아내리는 피부는 당신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신, 내 전부인 당신을 떠나보냄으로, 이토록 보잘것없이 타들어가는 심장만 남아버렸다고. 저 멀리 노을이 진다. 살구빛 빗살무늬 토기를 닮은 모습이 아름다워서 눈이 멀 것 같았다. 멀리 두고 보아야 사랑으로 남는 것들이 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독 따뜻했고, 눈사람은 빠르게 형체를 잃어갔다.
누군가 발로 툭툭 건드리는 촉감에 눈동자를 슬쩍 움직여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잔뜩 짓궂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을 통해 나의 형편없음을 되돌아보는 일. 퍽 씁쓸했다. 지레짐작했다고 해도 막상 맞닥뜨리니 훨씬 형편없어 보이는 떠돌이 같은 삶. 기다리면 오는 걸까. 나를 영영 잊은 거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눈사람은 모든 희망을 싣고 너른 항해를 펼쳤던 군함이 서서히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듣기 거북할 만큼 우렁찼던 뱃고동 소리조차 꿈에서 본 듯 희미해졌다. 애초에 서있던 것이 아닌데 스스로 진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허망한 착각의 괴로움이 사방에서 날아와 두툼한 살가죽에 꽂혔다. 터무니없이 망가져버린 비참한 감정을 무엇으로 달래야 버틸 수 있을지. 불어오는 칼바람에 마음이 아려온다. 뼈가 없지만 뼛속까지 시리다는 말이 공감되었다. 어떤 날 먼지처럼 태어났고 태어난 날 어떤 이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하나 둘 받아들일 때마다, 불안은 성근 진눈깨비가 되어 무식하게 큰 눈덩이를 잘근잘근 씹어 삼키고 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붙어있던 앙상한 나뭇가지 팔목이 바람에 나부끼며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기괴한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
길고 어두운 참회의 동굴 속에서. 눈사람은 문득 태어난 이유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온종일 서있는 자세로 묶여 줄곧 하나의 방향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단 한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서글픈 숙명을. 원망으로 며칠 남지 않은 겨울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미움이 사그라들 때 즈음엔 사랑이 다시 찾아왔고, 사랑의 목적지는 거센 바람의 방향과는 별개였다. 멋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열병 때문인지, 눈사람의 형체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흘러내린 소꿉장난의 기억을 닮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외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받아들이려 애썼다. 추억으로 남기는 방법에 대해 터득해 가던 어느 겨울밤.
어디선가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태초 아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말. 그런데, 자신은 인간이 아닌데 왜 작아지는 걸까 고민하며 그런 스스로 또한 진짜 인간은 아니었나 실없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원망이라는 감정을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길가에 지나가는 아무 인간을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당장 마주할 수 있는 건 허허벌판 같은 현실이었다. 뼈저리게 외로웠다.
가벼워진다면, 사라진다면 영영 편안할 수 있을까.
어느덧 끈적이던 근육들이 조금씩 유해짐을 느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하던 찰나, 눈사람은 알게 되었다. 애초에 돌아온 곳은 이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든 고난과 역경과 시련의 과정들은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함이었음을. 잠시 거대한 몸뚱이였던 자신은 얼마 후면 자유의 신이 되어 어느 촘촘한 공기 중으로 섞이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벌였던 것은 본래의 가치를 깨닫기 위함이요,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며 기쁨을 주고자 했던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 간과하고 있던 일들이 돌연 뇌리를 스쳤다. 나는 누구였던가. 내가 나로 살았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이곳은 행복했던가.
그렇다면 기쁨을 얻은 것은, 배움을 익힌 것은 그들이 아닌 나 자신이었구나.
가장 낮은 곳으로 촉촉하고 투명한 물기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틈새를 따라 물줄기가 자취를 감추더니, 그를 잔뜩 머금은 바닥은 이윽고 짙은 진흙색으로 변하였다. 따뜻한 온기의 입김이 피부에 와닿았다. 마치 다음 행선지를 고르는 듯, 잔잔하고 규칙적인 농도의 숨소리만이 허공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