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by 블루나잇

1

삶이 박약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젊은 거리에서 젊지 않은 남자가 피켓을 들고 배회한다. 비루한 널빤지를 휘청거리며 우렁찬 음성으로 외친다. 구원은 구원으로부터 당도한 것이 아니며 구원을 부르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지옥의 수렁으로 구속될 것임을... 핍박과 억압의 굴레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며 예수의 얼굴 부처의 하반신으로 떠들어대던 사람들. 자신을 하늘의 계시로 인해 이 땅에 내려앉은 신으로 지칭하던. 그런 명명들을 괴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인간의 인간들. 사람과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선 인과관계. 시초를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은 어느새 늙은 암호가 되어 시멘트 바닥에 나풀거리듯 부서지고 있었다.


2

수백 개의 인형 더미에 갇혀 묵묵히 눈깔을 붙이는 어머니. 삶은 축복이라던 누군가의 세례명이 점차 기운을 잃어가던 핏빛 시절. 명예가 실추될까 맨 얼굴로는 집 근처 시장조차 활보하지 못할 소설가의 애처로운 붓질. 돌아봅니다. 그 자리에서 슬며시 돌아가다 보면 내가 보입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내가. 인형의 새까만 눈깔 위로 투명하게 그려지던 내가. 본질이 보이는 시점을 우리는 마주한 적 있습니까. 가려진 시간에 우리들이 묻혀있다면. 꺼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활기를 잃은 당신과 나의 눈알을 인형의 복부에 넣고 꿰맨다. 굴러서 되돌아 나오지 못하도록 칭칭 동여맨다. 기어코 안심이 되지 않아서 인형을 태운다. 홀로 남아 절절한 화마 속을 구르는 인형의 동그란 눈깔. 사람의 것을 꼭 닮은 모양. 텅 비어있는 동공. 눈알은 인형 속에 있고 눈깔은 인형 밖에 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지독하게 향긋한 어제의 메밀밭. 화력이 불어날수록 거침없었던 사람들의 새벽 장난. 폭죽 좀 더 사와 봐. 산만한 덩치의 남자가 말했고, 질질 아픈 다리를 끌며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꿈속의 꿈속의 꿈.


3

갑작스레 들이닥친 짙푸른 바다의 청록색 마녀는 성질이 고약했다.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며 불행을 골라 선물하더니, 이윽고 사람들의 이름에 무시무시한 저주를 걸어댔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탓에 사람들은 서로를 알파벳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A의 직장, B의 취미, C의 가정사. 알파벳은 사람 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고 부족했고 형편없었다. 알파벳이 된 사람들은 다른 알파벳에게는 동질감을, 같은 알파벳에는 혐오감을 느끼곤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해졌다. 사람들의 몸도 서서히 굳어 갔다. A는 A의 모습이 되었고, B는 B의 모습이 되었다. A는 이제 A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B에게는 혐오감을 느꼈다. 전쟁 중에 깜빡 잠이 들면 팔 한쪽 다리 한쪽 같은 것들이 댕강 잘려나갔다. 어느덧 사람이 아니었기에 별 상관없었다. 연탄과 횃불을 구하기 위해 마트에 출몰하는 마르고 무성한 무생물들이 점점 늘어났다. 밤낮을 떠들기만 하던 속보는 의미가 없었다. 극단적인 인생이 댕강댕강 잘려나갔다.


4

목각 인형의 뼈를 맞추는 잔혹한 과정. 삐걱댄다. 부러지는 절규의 시선들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뼈는 뼈를 알고 있다. 어떤 뼈와 맞물려야 하는지, 어떤 뼈로부터 도망쳐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전부를 인정할 수는 없다. 뼈는 뼈를 모르고 있다. 뼛속 깊은 사연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뿌리부터 시작하여 어떤 결말로 부러졌는지 그것을 알고 나면 자신도 부러질 것을 알아서. 애써 외면한다. 다시금 삐걱댄다. 목각 인형은 제법 유연하다. 딱딱하다. 유연하고 딱딱한 것은 위험하다. 그렇지 못한 것들을 패배감에 젖게 만든다. 목각 인형이 움직이면 나도 따라 움직인다. 울어대는 심장을 잘 매만져 보다가, 내 팔의 이음새, 내 목의 굵기, 내 장기의 꿀렁임을 관찰해 보다가. 가루로 뭉친 진흙 더미를 끌어안는다. 반쯤 떨어져 나간 심장이 질퍽거리며 운다.


5

체크무늬, 빨강 파랑 노랑 주황의 체크무늬. 네모난 창틀 안에 가둬진 여섯 개의 줄기. 열 개의 실오라기를 닮은 목숨. 쪼개고 쪼개어질 때마다 청명하게 빛나는 윤슬. 그들은 바다를 가졌다. 흘러간다. 체크무늬. 흘러가다가 마주친다. 네모난 창가. 그 안에 숨겨진 뜨거운 선인장. 깊고 따가운 햇무리. 원의 형태를 바라보면 우리도 둥글어질까 싶어 줄곧 응시한다. 사라질 때까지. 체크무늬를 닮은 새벽 그림자. 밤새 울다가 목청을 잃은 사마귀 무리. 까치가 웃는다. 우리는 까치를 좋아한다. 반가운 손님이지 않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 불청객. 하루아침 착각해 버린 어제와 다른 얼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마음. 끝나지 않는 동굴 속에서 처절한 동굴을 맞이하는 기분. 탈출. 탈출. 탈출. 고소한 모래알이 사정없이 흩날린다. 아무도 모르는 결말의 사랑을 한다. 모래를 씹다가 뱉는다. 입 안에 여과 없는 서걱거림이 출렁인다. 그들은 바다를 가졌다.


6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알파벳 D. 자신의 안에 소중한 생명이 자라고 있다며 미소 짓던. 따갑고도 살가운 그녀의 태양. 아픔을 이겨낸 성숙한 석양. 시대의 고난 같은 것을 모조리 사랑하는, 짙고 여린 어떤 생명의 보호막. 길을 걸으면서도 감내한다. 안는다. 나는 당신에게 경애(敬愛)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 뒤로 경애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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