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은 흑백으로 살아있다

by 블루나잇

흑백은 흑백으로 살아있다

너무 검지도 희지도 않은 그림자

어제 죽인 과거의 흔적을 닮은 빛깔


죽기 전에 또 보자

이런 말을 꺼내면 서글퍼진다


티브이에서는 철 지난 무성영화가 흘러나온다

꿈을 가진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지만

소리는 뚫고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빙빙 맴돈다

입모양 눈맞춤 손짓 발짓 같은 것들이

삽시간 웅크렸던 방안을 가득 메우고


기대어진 몸을 포개지 못하는 평행 글씨 하나가

영글어진 기운으로 티브이 전원을 끈다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가난했어

무성의 입이 트인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목소리

시옷은 언제부터 기울어진 인생이었을까

네가 묻는다

그리고 나

는 삶이 슬프다고 답했고


고꾸라지는 안테나

만지면 전기가 오를 것 같아

자꾸 뒤만 돌아본다

걔는 목이 없어서 후회하지 못하나 봐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일지도 몰라


미련

눈물 같은

단어를 끌어안

고 살아가는 인


조금 이상하지 않니

누구도 말하라 시킨 적 없고

누구도 생각하라 강요한 적 없잖아


어쩐지 슬픔이 관객들을 조여 오는 것만 같지

왜 우는지 물어도 이유를 알 수 없을 거야

그러니 티브이를 다시 켜 줘


어느덧 떠오른 주황빛 노을을 등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 둘이서 인사를 주고

받는 장면


무릎이 아프다며 나물을 건네고

돌려받는 것은 작은 과자 꾸러미


살아있자는 인사는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기록될지도 모르는데


그림자가 두 노인을 배웅한다


검지 않고 희지도 않은

생생하게 숨 쉬는 생명체가 목소리가

몰랐던 표정 입꼬리 눈짓까지


흑백은 흑백으로 살아있다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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