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물으면 너는 항상 기억이 떠오른다고 말했어. 니은 디귿을 발음하는 너의 가느다랗고 긴 혀를 바라보면서 그 위로 푹 퍼진 면발들처럼 널브러진 내 이름이 꿈같다 느낀 적이 있었지. 그때 그 기역의 기억은 잘 있을까. 내내 뒷모습만 바라보는 삶. 글씨체가 제각기 다른 하루들을 솎아내는 일을 하다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맞닥뜨려야만 했을 때. 모른 척하는 편이 나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숨을 잠시 멈췄을 때. 이제 누구의 뒷모습이 너였는지 기억조차 잘 나질 않는구나.
지나간 주머니에는 낡은 라이터가 있어.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쓰임과 용도가 사용법에 어긋났다는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더구나. 무언가를 태운다면 그것이 우리가 쌓아온 생의 잔해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남겨진다는 것은 퍽 가슴 씁쓸한 일이었지.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도록, 그 시간만큼 우리는 참회하고 반성해야만 하잖아. 나는 너를 보면 주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 할 만큼 했다. 이만하면 됐다. 더는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그건 아마 지겨울 만큼 오래도록 기다렸기 때문일 거야.
- 지금 보내는 문장들은 너로 구성되어 있다. 오래 아프고, 자주 슬프고, 깊게 생각하도록. 가시의 낱말. 기역으로 시작하는 가시. 기역으로 찔린 우리. 가시의 기역. 기역과 당신. 기역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밀어내지 못하고 안으로 솟구치는 비명 닮은 추억들은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밥을 굶는 일이 잦았다. 잡생각을 야금야금 먹은 탓인지, 성근 상념들이 나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끼니를 거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지. 매미는 칠 년을 땅 속에 숨죽여 있다가 세상 밖에서 한 달을 산대. 그마저도 우는 인생이라는 게 영 서글프지 않니. 울어야만 살 수 있는 삶도 있어. 그게 그들의 전부인 그런 생도 있더라고. 오늘은 생각을 조금 굶어볼까. 아픈 생각들을 거르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볼까. 희망의 색을 입은 마음이 들 때는 동시에 네가 떠오른다. 어떤 것이 나를 살게 하는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먹고 먹지 않고 굶고 굶지 않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게 변해버린 일도 참 오래된 것 같아서.
나는 너를 추억이라 불러. 어찌 되었든 심장 깊숙이 남은 생명이잖니. 떼어낼 수 없는 몸의 일부분이기도 하겠지.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애정표현처럼 꺼내면 수줍게 웃으며 비속어 섞인 표정을 드러낼 너를 알아. 아직 너를 많이 알고 조금은 모르겠기도 해. 어쩌면 조금 알고 많이 모르는 편이 더 맞는 말이겠지.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결국은 너를 거론하고 싶은 나의 오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잘게 갈아 마셨어, 네가 남겼던 쌀알 같은 그리움. 질퍽이게 희어진 형태를 하고 점점 멀어지는 우리의 거리감이, 식도를 타고 흘러 끝내 나를 녹이고 죽이려 들던 어느 저녁에.
잠과 새벽을 넘나드는 푸른 철도 위를 한 사내가 걷고 있다. 밤의 반절 정도를 걷다가 길을 잠시 멈추고는 건너에 있는 오두막을 줄곧 응시한다. 머리 위에는 검은 초승달. 주머니에 있는 성냥개비 하나를 들어 양초에 불을 켜곤 이내 밝아진 꿈과 현실의 늪을 바라본다. 남자는 건너야 하는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틈새로 흩날리듯 서있는 여자의 실루엣. 멀뚱히 선 사내를 부른다. 자세히 보니 부름이 아닌 것도 같고. 이윽고 여자의 눈물이 숲길 곳곳을 채우고 촛불을 뒤덮었다. 불바다와 물바다가 섞여나가던 지점에 남자는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로 서있다. 발을 버둥거리지도 않고. 또렷한 눈동자로 돌아서서 묵묵히 떠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본다. 뒷모습. 자꾸만 등을 보이는 사람들. 다시 태어나도 그걸 바라만 보는 사람들. 더는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말하는 씁쓸하고 중후한 목소리.
기역, 니은, 디귿이라 읊던 황량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만약 마녀라면, 당신에게 모든 나를 내어줘도 된다는 생각이 억울하지 않도록. 아주 나쁜 당신이라면. 이따금 우리의 세계가 이어져있는 것 같다는 볼품없는 희망이 생겨납니다. 어제 세상 밖의 빛을 처음 마주한 짐승처럼 나는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얼마 못 가 죽을 것을 알아도, 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대도.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을.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내온 날들이,
당신이 살아온 세계가 어떠했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