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안부

by 블루나잇

벌써 까마득해졌군요. 나는 잘 지냅니다. 영문을 모르는 마음들이 허공을 쏘다니고, 길가의 매미들이 잃은 가족을 찾듯 울부짖는 와중에도. 나는 잘 지냅니다. 당신의 말을 빌려 솔직해지자면 나는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어색한 안부를 이렇게 물었지요. 서로의 곁에서 주고받는 숨이 안정제가 되었던 시절을 여즉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철없고 길 잃은 새끼 양의 모습이었겠지만, 당신은 늠름한 느티나무 같았습니다. 커다란 그늘을 잊지 못하고 그림자가 내뿜던 향을 놓지 못할 때엔 우리가 자주 걷던 삼번가 거리를 거닐며 뽀얗게 쌓인 눈을 밟았습니다. 그리운 노포들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마음도 사치가 되겠거니. 결국 돌아오지 못했군요. 가장 구석에 피어난 불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아 슬픈 마음입니다.

요새는 자주 깜빡깜빡하여 지난밤의 일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덜컥 겁이 나서,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까 봐. 기억도 안 날만큼 형편없는 삶일까 봐. 뻔뻔한 사람은 미련이 많고 염치가 없습니다. 내가 미울 때마다 당신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마지막이라는 핑계를 대고, 후회라는 마침표를 두고. 우표에 끈끈한 풀을 이어 붙여 아무렇지 않게 덧대어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을 다시 붙일 수는 없겠지요. 어느 날은 다 잊은 사람처럼 행세하는 내가 낯설어서 일부러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얼굴을 마구 찡그리기도 합니다. 당신이 찾아줬다고 하여 내 표정까지 앗아가지 않았습니까. 돌려받고 싶은 게 얼굴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을 언젠가는 땅에 꼭 묻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름 없는 산에 찾아가 우리가 기억을 잃어도 그 산은 우리를 기억하도록. 보잘것없는 것들 중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광물로 남아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 먼 옛날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을 건넸었다는 사실을, 어느 하나는 간직하도록. 당신은 나를 잊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아집니다.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습니다. 기다림보다 더 힘든 고문. 사랑을 끝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떤 형벌이 주어집니까.


찢어진 보라색 우산

짝을 잃은 낡은 의자

쭈굴쭈굴한 회갈색 풍선


밤의 공원

비 내리는 오후

방울져 내리는 흰 파라솔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는데

모난 자갈밭 위를 하염없이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주면서

웃고 있는 당신


내가 해 주지 못한 게 많아 미안하다는 말을 넌지시 흘렸을 때 당신의 표정은. 발목이 짓무르고 발바닥에 새카만 가시가 박히는 영혼의 부름에도 평온했던 이유. 강한 당신, 그리하여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적시고 급류의 물살이 죽음으로 흐르는 순간에도. 끊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소식처럼 실낱같은 갈매기 무리가 연이어 장식하던 하늘. 그 위로, 나머지는 우리가. 우리의 날들이 기억되고. 어젯밤 태어난 그리움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는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추억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추억이 있습니다. 공백이 존재를 증명하는 동안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을 가득 채우던 당신과 나의 에고, 간절한 그것이 살아있는 야생마가 되어 너른 들판으로 나아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잘린 날개에도 울지 않았습니다. 떠오르지 않는 밤은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집어삼키고, 머금고. 곱씹고. 누가 누구였는지 이제는 구분도 해내기 어려울 만큼 당신과 나는 같았었는데. 그때 거닐기로 했던 동네의 조악한 공원은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어 사라지는 중입니다. 흐릿해진 공작새, 밤의 너구리. 야생과 인간이 손을 마주 잡는 일. 평생 그리고 영겁. 어디까지 희미해져야 당신을 놓을 수 있을까요.

나는 살아있습니다. 내가 궁금하지도 어쩌면 존재의 여부를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작은 인사를 보냅니다. 이 안부는 나의 마지막 편지가 될 것입니다. 드문드문 말이 끊어질 때마다 숨 가쁜 상념들이 이곳에 적히고 싶어 안달을 내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이지만, 안될 말들은 속으로 씹어 삼키고 눈물로 흘려보낸 뒤 당신이 보아도 힘들어하지 않은 낱말들만 옮겨봅니다. 무색무취의 삶은 탈이 날 일이 없어 편안하고, 간혹 흙빛에 발을 담글 때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도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울지 않지요. 그래서 당신은 나를 다 잊었습니까. 수많은 면억을 그리도 쉽게 지우셨습니까. 원망스러운 게 있다면, 나는 당신을 잃은 이후로 하나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제자리에서. 기다리듯 후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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