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잘 것도 없는 밤
당신 참으로 힘들었겠다.
#1
가을이 되면 시장에서 밤을 몇 되 사다가 냄비에 찌고는 집에 밤냄새로 가득했다. 퇴근해서 힘든 몸을 이끌고는 드라마를 보며 밤을 연신 칼집을 내며 자르고 있다. 쭈글쭈글한 몸을 가지고 있는 벌레는 정말 싫어하면서도 밤을 그렇게 칼로 하나하나 잘랐다. 그러곤 벌레라도 나오면 '으억 이것 좀 치워봐 봐 으으으'라며 소리친다. 그리고 벌레가 치워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밤을 한 땀 한 땀 칼로 까낸다. 겉껍질은 얼마나 단단한지 검지 손가락이 빨갛게 아려올 때까지 계속 깐다. 옆에 있는 아이 세명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새처럼 하나, 둘, 셋 하며 받아먹는다.
학교 다녀와서도 식탁 위에 올려있는 밤 한통을 입에 한가득 넣고 맛있게 먹는다.
#2
할머니 집에는 어른 키보다 큰 밤나무가 있다. 가을만 되면 까슬까슬 고슴도치 같은 밤송이가 투투 툭 떨어진다. 어른들과 함께 왼발, 오른발을 이용해서 밤을 슉 발견해서 고사리 손으로 하나 둘 주워본다. 밤을 한가득 가져다가 냄비에 찌고는 할머니 할아버지 옆에 손주들이 앉는다. 밤을 까는 속도보다 받아먹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당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몇 시간째 받아먹는 손주들을 보며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인다. 검지손가락이 빨갛게 아려오는 건 내일이면 사라지지만 이 사랑은 영원히 손주들 마음에 남아있겠지.
갑자기 엄마가 먹으라고 가져온 밤 한 봉지 냉장고에 계속 두다가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어 주말아침에 밤을 쪄본다. 남편과 둘이 앉아서 밤을 깐다. 엄마는 드라마를 보며 깠다면 우리는 비욘세, 마룬파이브 노래를 들으며 소소하게 이야기 나누며 밤을 1시간째 까고 있다. 까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가 까줄 때, 할머니가 까줄 땐 당연하게 받아먹던 걸 우리가 아이를 위해 밤을 까고 있다고 말이다. 우당탕탕 뛰어놀다가 아이가 와서 밤밤밤!!! 을 외치면 까던 걸 멈추고 참새같이 벌린 입에 밤을 하나를 넣어준다. 혹여나 목에 사레가 들릴까 봐 물 한잔도 준비해 둔다. 아이가 또또또라는 말에 힘든지도 모르고 밤을 깐다. 병원비도 안 나온다고 힘든 것 그만 하라며 소리치는 철없이 말했던 아이는 사라지고 어느새 닮아버린 사랑
당신 참으로 사랑했구나.
*첫 문장 출처 :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