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dy Spider Aug 25. 2023

Prologue

Old Soul의 탄생

#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어제 날짜의 신문 기사 제목이다. 이 기사에는 위에 보이는 짤이 나왔는데, 조앤 윌리엄스라는 미국 석학이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가임기 여성 1인이 평생 낳는 자녀수)이 0.78이라는 통계를 보고 경악을 하는 장면이다. 정작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데, 저 멀리 태평양 건너에 계신 분이 한국의 소멸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걱정해 주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정말로 대한민국이 소멸할 수도 있는 건가. 심히 걱정되기도 하다. 평생 낳는 자녀가 소숫점 이하이면 한 명 조차 안 낳는다는 건데...서른하나의 나이에 딸 아이 하나라도 낳았으니, 평균 이상은 하는구나.


나는 미혼 시절에 아이는 낳고 싶었지만 결혼은 원치 않았었다. 지금이라면 사유리 같은 케이스도 있었을텐데, 10년 전 나는 사유리와 같은 발상은 아예 하지 못했고, (물론 스탠포드 대학 연수 시절 팔로알토에 정자은행이 있다고 해서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더라도 아마 실행에 옮길 용기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현실 개념이 지극히 없었다. 그래도 선행학습을 시켜야 하고, 특목고에 보내고, 명문대에 보내고, 또 그렇게 하려면 강남에서 살아야 하고! 하며, 아이를 키운다 생각하면 떠오르는 집단 무의식 속의 "must"들이 나에게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딸 아이가 고3이 되면 내가 직접 가르쳐가며 수능 문제집을 같이 푸는게 나의 로망이었다.


# 시진핑 내외, 내 딸 태몽에 출연

그렇게 무식하고 용감했던 나는 2013년에 결혼하고 2014년에 바로 딸을 낳았다. 출산 역시 결혼과 마찬가지로 숙제를 하려면 빨리 하는게 낫다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막 임신을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다. 딸을 임신할 무렵 나는 남편이 아직 해외 유학 중이라 홀로 시댁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방학 중에 잠시 집에 와 있는 동안 내 딸 켈리가 잉태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임으로 고생하는 많은 부부들이 있는데도 정말 아무 의도나 계획없이 아이가 태어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켈리는 태몽이 심상치 않았다. 꿈에서 나는 아주 커다란 유람선을 타고 있었다. 그 유람선은 너무 커서 끝에서 다른 끝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 앞쪽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두에 도달하자, 놀랍게도 시진핑 중국 주석과 그 부인(펑리위안 여사)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멈추어 섰는데 시진핑 주석이 나에게 표창장 같은 것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무심코 유람선 아래를 내려다 보았는데, 지금까지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촘촘하게 물결을 만들어서 배를 떠받치고 있었다. 표창장에 뭐가 쓰여있는지 자세히 보려고 했는데, 딱 그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 중에 세상 느껴보지 못한 졸음을 느끼고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깨어보면 작성하던 문서에 스페이스 바를 계속 누르고 있고 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병원에 가보니 임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열 달 동안 남편 없이 시댁에 몸을 맡겨 살아가던 중 뱃 속에 새로운 생명체를 품고 회사에 다녔다.


# 올드 소울의 탄생

임신 상태에서도 나는 업무를 포기하지 못했다. 혹여나 상사가 "쟤는 임산부이니 일을 많이 주지 말자"라고 할까봐 더 열심히 했었다. 다행히 아이가 나를 닮아서인지 몸집이 작아서 8개월 때까지는 자세히 보지않으면 임신인지 몰라볼 정도였다. 실제로 8개월 때 경제조정관을 모시고 중국 선양에 출장을 갔었는데, 공식 일정 이후 선양 고궁을 둘러보려고 하려던 와중에 과장님이 "겡끼 사무관은 지금 임신 중이니, 좀 쉬게 하면 어떨지요?"라고 말씀하시자, 그제서야 조정관님이 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 과장님은 임신한 사무관을 출장에 데려왔다고 호되게 혼나셨다. (하지만 그 출장은 내가 만들어서 태교 출장으로 내가 가겠다고 우겼던 출장이었다.)


켈리는 임신 기간 부터 효녀였다. 입덧도 하나도 없고, 임신당뇨랄지 중독이랄지 그러한 건강 상의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켈리를 뱃 속에 데리고 외교부 중국어 시험(진급을 위해 정기적으로 봐야 하는 언어시험)을 보았는데 평소 실력보다 잘 나와서 2급이나 받았었다. 그냥 좀 몸이 살짝 무거운 정도?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회사를 다녔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아빠"의 태교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빠"는 태교를 자발적으로 하기는 커녕 산모가 잠을 안자면 태아도 수면이 부족하다며 잠 좀 자라고 난리였다. 하지만, 당시 산부인과 담당의사에게 물어보니, 태아는 산모의 수면 시간과 관계 없이 자궁 내 양수를 떠다니며 원하는 때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찌저찌 열달을 보내고 나는 출산 예정일 7일 전까지 꾸역꾸역 회사를 나온 다음 출산휴가를 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날 모든 인수인계를 마치고, 토요일날 동기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바로 그날 저녁 산통이 시작되었다. 분명 평소와 다른 통증이 느껴진다는 건 알았는데 나는 설마 했었다. 왜냐면 가진통이라는게 있고 그 가진통이 느껴지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면서 진짜 아픈 진짜 산통이 시작된다고 하여 좀 더 기다려봤던 것이다. "분명 5톤 트럭이 배 위로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이 건 그 느낌이 아닐거야"라고 계속 기다리다가 결국 새벽에 산]부인과에 가서 3시간 진통 끝에 켈리를 낳았다. 켈리는 태어나자마자 나의 손가락을 저 위의 사진처럼 꼬옥 잡았다. 열 달 동안 내 뱃 속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한 동지. 약간 "아~ 너였구나~" 이런 느낌이었다.


막상 켈리를 낳고 나서 나는 참 준비되지 못한 엄마였다. 솔직히 인정한다. 준비라는 것은 비싼 유모차나 첨단 이유식 기계가 아니었다. 바로, 사회에서의 나의 입지, 젊은 외교관으로서 조직에 헌신하고 성과를 내고자 하는 이미지 같은 것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것인데, 엄마로서 준비가 안되었던 나는 늘상 추구했던 단순한 함수(x: 나의 시간, 노력 투입, y: 성과와 평판)에 육아라는 새로운 목표를 포함시키기가 어려웠다. 나의 장기 목표, 아이의 성장단계와 같은 장기적인 흐름을 놓치다 보니, 매일 하루하루 저글링에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으로부터 "애 버리는 년"이라는 가슴에 못 박히는 말도 들어보았다.


그러한 말에 사로잡혀 위축되다 보니 결국, 나는 딸이 초등학교 가기 직전까지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남편과 별거하면서 아이를 남편쪽으로 보냈다. "어차피 너가 못 키우자나, 일한다고 뛰쳐나가는 사람이 무슨 애를 키워." 인정하기 싫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주말에만 아이를 만나는 주말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무엇을 하든 잘못이다. 그게 모든 엄마들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렇게 해도 잘못, 저렇게 해도 잘못이다. 나는 그게 처음에는 정말 싫었다. 왜, 나는, 잘 못이 없는데. 혹은 무겁게 내리는 책임감이라는 것이 참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왜 부부가 같이 동굴 밖으로 나가서 사냥을 하는데 엄마에게만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지는 것일까. 하고. 게다가 내 남편은 당시 학생이어서 사냥을 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냥도 하고 애도 키우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그건 엄마로서 감당해야 하는 운명과 같은 것이고, 그 역할을 통해서 더욱 큰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정말 중요한 건 결국 육아에 대한 철학과 신념, 아이와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내 아이는 내 아이고, 나는 그 아이의 엄마이니까. 결혼 초기 부터 무너져버린 엄마로서의 자긍심이 지난 10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의 말에 매여, 한없이 눈물이 났었다. 아니, 그 위축감은 내 스스로 혼자 부여잡고 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2014년 내 딸이 태어나고나서 2020년 7월 남편에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이를 보내기 전까지 워킹맘으로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켈리는 사실 내가 육아에 공을 들였던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훨씬 더 씩씩하고 훌륭하게 자라고 있다. 나와 함께 지냈던 때도 그랬지만 그녀는 자기 나이에 비해 정말로 성숙하고 현명하다. 최근에는 수학 학원 선생님한테 "너는 인생 몇 년차니?"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 딸은 여러 차례 환생을 거듭해서 나를 찾아온 "old soul"일 것이다. 이 책은 중국과 미얀마에서 내가 켈리와 함께 하면서 내 가슴에 와 닿았던 딸 아이의 주옥같은 명언 이야기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