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셀프 교육
해외 주재 주재원들 사이에서도 결국 핫이슈는 자녀들 교육 문제이다. 내가 엄마들 모임에서 "인생머리" 타령을 하면 교육부 홈페이지에서 교육 과정을 전부 다운로드 받아서 중학생 딸에게 직접 사회탐구 영역을 가르치고 있었던 워킹맘 선배님이 너가 뭔가 모르는구나 하는 눈빛으로 "극장의 비유"를 들어준 적이 있다. 극장에서 첫 줄이 아닌 바에야, 내가 아무리 앉아 있는게 맞다고 생각해도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난다면 결국 나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괜시리 위축되기 싫어서, 왜냐 난 아이를 붙잡아 두고 공부시킬 시간도, 그 시간 동안 공부를 시켜줄 과외를 구할 돈도 없기 때문에, 그냥 저건 시디 신 포도일 뿐이야. 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랬던 나에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여운을 남긴 켈리의 명언이 있다.
한글을 더듬더듬 읽을 수 있게 된 시점에, 갑자기 나는 욕심이 났다. 그래 내가 영문과 출신이고, 영어 과외도 많이 했으니까 영어를 직접 가르쳐 봐야지. 훈민정음에서 알파벳으로 직진했다. 켈리는 알파벳도 잘 따라 그렸지만 무언가 한글보다는 덜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과를 가리키며 "켈리야, 봐봐 이거 앱뽈~ 앱뽈 해봐" 어디서 들은건 있어가지고 발음을 굴려서 apple을 가르쳐 보려 했다. 그랬더니, 켈리는 "엄마 이거 앱뽈 아니라 사과 자나" 라고 하며 종이에 ㅅ, ㅏ, ㄱ, ㅘ를 적었다. 그렇지 이건 사과지. 왜 굳이 잘 자라나는 아이의 뇌세포에 "앱뽈"을 우겨넣어야 하나. "공부머리" 대신 "인생머리" 비중이 좀 더 컸었다면 어땠을까 했던 내가, 이렇게 생각과 달리 영어를 강제로 가르치려고 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사과야. 켈리가 맞아." (그래 좋아, 너의 애국심)
켈리는 세 살부터 일곱 살 까지 중국과 미얀마에서 살았다. 중국에 있었을 때는 한족 보모 아주머니와 어느 정도 중국어로 대화가 되고 "꿀물 한잔 주세요(Gei wo yi bei fengmeshui)"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정도였다. 한번은 아빠가 "달팽이가 죽었어(Woniu Si le)"라고 말할 때 "Si"를 "4"라는 뜻의 4성으로 발음하자, "아빠, 그거 아니고 "Si le"야"("죽다"라는 뜻의 3성)라고 교정해 줄 정도로 중국어 성조에 대한 개념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을 떠난지 오래된 지금 켈리는 중국어 하나도 기억을 못한다. 미얀마에서도 미얀마어로 미얀마 애국가를 부르고 영어 유치원에서도 소통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지금은 역시나 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자녀에게 들어가는 사교육이라는 자극은 생각보다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 비중이 크지 않다. 자녀 교육은 자녀 스스로 하기 나름이고, 그 주도권을 아이에게 주는 것이 맞다. 만약 켈리가 공부와 탐구를 좋아한다면 그 쪽으로 나가면 되고 아닌 경우에는 자기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한 가지를 발견해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그나마, 비록 언어는 다 휘발되고 말았지만, 켈리가 어릴 적 다양한 환경과 문화적 다양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좋았던 것 같다. 7세 이전의 모든 경험은 의식 레벨이 아니라 잠재의식, 그리고 더 깊이 무의식에 새겨진다고 하니까, 그녀의 무의식에 나와의 해외 생활 경험이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수채화로 남아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