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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dy Spider Aug 25. 2023

괜찮아, 일은 할만큼 했자나.

다섯살 딸 아이의 카운셀링

# 워홀맘의 일 욕심

글을 쓰다보니 단순히 "워킹맘"만으로는 나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워(커)홀(릭)맘"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보았다. 나는 7년차에 주중대사관으로 발령되었고, 7-8년차야말로 조직에서 평판을 구축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물론,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려가는 데에도 바쁜 시기가 맞다. 그렇듯 30대 인생이라는 것은, 20대 만큼이나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저 사방에서 치이고 바쁜 날들이었던 것 같다.


주중대사관과 같이 큰 해외 대사관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정무(주재국과의 관계 전반), 경제(경제협력 부분), 영사(비자 및 국민안전), 총무(대사관 행정)으로 나누어진다. 회사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당시 나의 관념도 그렇고 "정무"를 담당하는 것이 대사관 업무의 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아이와 동반하다보니까, 시도 때도 없이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해야 하는 정무 부서에는 갈 수가 없었다. 대사관에서는 나름 나를 배려해 준 것인데, 나는 약간 억울함을 느꼈다. 빨리 "정무"를 배우고 싶은데..하고. <-- 참 근시안적이고 짧은 시각이었지만 그 나이 그 때에는 그랬었나 보다.


"애엄마" 이지만 오 서기관은 다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말 애썼다. 경제 파트에 있으면서 미중간 기술 경쟁, 중국의 대북한 경제 제재 이행 현황과 같이 괜시리 정무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 보고서를 써서 올리기도 하고, 정무에서 오만찬 배석 인원이 필요하면 자원해서 가곤 했다. 그렇게 한 결과 주중대사관 근무 마지막 6개월은 잠시나마 "정무" 파트에서 일 할 수 있었다.


# 괜찮아, 일은 할만큼 했자나.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구글에서 논문이나 포린 어페어지 같은 잡지도 좀 보면서 공부하며 따라가야 하는데 아무리 워킹맘 아닌 워홀맘이라 해도 그럴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일에 있어서 가히 천재라 불리우는 상사를 모시고 일을 하는데, 그냥 느껴지기에 내가 그 분 보다 빠르게 상황 판단이 되고 정확한 대처방안이 나오지 않음에 스스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시덥지 않은 상사의 말에 상처를 받고 말았다. 정확히 내용이 생각이 안 난다. 그 분은 나를 오 서기관이라고 안 부르고 "켈리맘"이라고 불렀는데, 그 때 당시에는 나를 애엄마로만 보는 건가 하는 자격지심 때문에 기분이 살짝 그렇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도 켈리도 반갑고 좋게 받아주고 싶었던 게 그 상사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안다.)


어느날은 집에 와서 딸에게 한글 공부를 시켜 놓고는 나도 옆에서 끄적이다 보니까 그 천재 상사를 그리고 있었다. 켈리가 "이 사람 누구야?"라고 말해서 "응, ***이라는 참사관님이신데, 일 엄청 잘하는데 엄마가 오늘 머를 실수해서 이 분이 머라고 했어."라고 답해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켈리가 나를 꼬옥 안아주면서 말했다.


괜찮아, 일은 할만큼 했자나.
* 참사관님은 사람이 나쁜게 아니야,
생각이 잘못된 거야. 라고.

순간, 딸래미의 나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흔히들 "내리사랑"만 알고 있는데, 나는 "올리사랑"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늘 내가 딸에게 주는 것이 더 많고 희생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딸도 나름의 자기 시각에서 엄마를 항상 보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취약한 내면을 딸에게 들킨 것 같아 좀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날 저녁 그 순간에는 세상에 나와 켈리 두 사람이 "사람 인" 모양으로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모녀의 동지애

부족하면 부족한 채로 어설프면 어설픈 채로 나는 켈리를 옆구리에 끼고 사무실에도 데리고 가고, 심지어 외교 네트워킹 자리(약간 인포멀한 정도)에도 데리고 나가고, 켈리를 좋아하는 독일 기자 부부네 집에도 데리고 다녔다. 일본대사관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을 때는 귓속말로 "엄마, 저기 오른쪽에 있는 오빠가 젤 착한거 같아"라고 말해 주기도 하고. 잠이 오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마치 특종 기사를 쓰느라 밤을 샌 사회부 기자처럼 잠이 들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워홀맘의 욕심으로, 혹은 딸이랑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내 인생의 경험의 세계에 켈리를 초대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찌보면 잘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나와 켈리는 보통의 엄마와 딸 보다는 더 깊고 진한 "전우애" 같은 "동지애"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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