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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dy Spider Aug 25. 2023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첫 해외근무와 함께 시작된 홀로서기

# 베이징 엑소더스

이상하게 아이를 낳고 시댁과 남편의 대우가 현저하게 나빠졌다. 뭔가, 그렇게 마음대로 대해도 "도망"가지 못하는 아주 확실한 존재가 생겨버려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켈리가 태어나자마자 나와 남편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고, 급기야 나는 켈리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리고는 고심 끝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문제를 다 깨끗이 해결했어야 하는데, 나는 또 다시 해외 근무라는 도피처를 찾았다. 갈등이 끝을 보이지 않았다. 인생을 통틀어서 내 자신 말고는 나를 무시하고 천대할 존재가 없던 것 같은데,  일생의 모욕을 그 당시에 집약적으로 다 당해 본 것 같다. 내가 그냥 그 쪽 아이를 낳은 틀거리(vessel)로 취급한다는 느낌이었다.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 것을 "애 젖 줘라, 애 안아줘라." 엄마로서 존중받기보다는 그냥 애를 키우는 도구처럼 말이다. 그때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러한 "말"들은 웃어 넘길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때는 에고가 너무나 컸다. 


나는 딸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고 아꼈다. 하지만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영부영하다가는 해외 공관 근무 시기도 놓칠 것만 같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시댁이랑 계속해서 아웅다웅하고 남편과 녹취 싸움이나 하고 하는 게 죄다 시간낭비 같았다. 그래서 모두들 안 가겠다고 하는 중국 대사관에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일단 피하자. 계속되는 싸움 속에서 지칠대로 지친 나는 안일함에 손을 들어주었다. 남편은 시아버지 생신이 2월 26일이니 그 때 켈리가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나중에 내가 좀 정착이 되면 아이를 중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북경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짐이 다 도착했을 무렵, 남편은 말을 바꾸어 데려다 줄 수 없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를 빼앗기는 것인가. 바로 3월에 한국에 잠깐 와서 아이를 보여달라고 했다. 만약 내가 데려간다고 하면 아이를 안 보여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법원과 시댁에 아이를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 행위는 아직도 법원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겨주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도 절실했기에. 나는 딸 아이와 친정 엄마의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아이를 그냥 북경으로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아주 혹시라도 시댁에서 아이를 안 보여주겠다고 할 것을 대비해서 나는 시댁에 내 남동생과 그 친구와 함께 갔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순순히 아이를 나에게 인도하였다. 한 두달 만에 엄마를 본 아이는 처음에는 동공이 흔들리다가 내 목걸이를 손으로 잡더니 "엄마"라고 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바로 북경으로 와 버렸다. 그렇게 켈리와 나의 북경 엑소더스가 이루어진 것이다. 


위의 그림은 나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어색한 표정의 켈리, 따사로운 햇빛이 드는 북경 집에 애착인형 뽀로로와 함께 앉아있는 켈리이다. 사실은 사진을 붙이고 싶었는데, 남편 성격상 딸 아이의 "초상권"이니 뭐니 하면서 또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기 때문에 그림 한번 배워 본 적 없는 내가 직접 그려본 것이다. 이렇듯 (전) 남편은 천둥 말괄량이 같은 내가 그래도 한번씩 더 조심, 조심에 더해서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 아이 동반 주말 출근

2016년 스페인의 한 여성의원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국회에 출근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워킹맘에게 있어서는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제한되어 있다. 아무리 어린이집이나 조부모 또는 보모가 지원해 준다 하더라도 엄마와 물리적으로 공존하는 시간 자체가 매우 부족하다. 스페인 국회의원의 사례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워킹맘이 꼭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이를 데리고 오면 어떨까? 하고. 물론 코로나 이후에는 "꼭 사무실에 출근을 해야 해?"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해외 대사관은 직원마다 개인 사무실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사무실에 데리고 오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매일 아이를 데리고 나간 것은 아니지만 주말에 어쩔 수 없이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있으면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정말루 literally) 사무실에 나왔다.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 켈리가 가장 좋아하는 레고를 사방에 뿌려놓았다. 한석봉 어머니처럼 나는 컴퓨터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그 동안 켈리는 레고를 만들었다. 어찌보면 우리 둘 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으니 본질적으로는 같은 행위이다. 켈리가 만든 레고가 더 위대했을 수도 있다. 얼마 안되서 켈리는 엄마 사무실의 구조를 다 파악하기 시작했고, 때가 되면 소파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집에 가자고 징징대는 일도 없었고, 그냥 엄마가 문서 작성하는 동안의 침묵 속에서 켈리도 침묵했다. 그러다가 내가 일을 끝낼 시점에 나에게 와서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이 이런 나를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내 개인의 작은 행동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좀 더 넓히길 바랬던 것 뿐이다. 다행히 대사관 동료들은 켈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켈리는 세 개 건물이 이어져 있는 세계 최대의 재외공관인 주중대사관을 자기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엄마는 자식의 환경이다. 껍데기다. 대사관 사무실, 대사관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 햇살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북경 집, 주말마다 들렀던 쇼핑몰, 가끔 놀러갔던 조양공원 등등 켈리의 어릴적 환경은 다 나로부터 나왔다. 그 환경에 켈리는 묵묵히 적응해 버렸다. 어느새 켈리의 취미는 조용히 앉아서 그림 그리는 일이 되었다. 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당시 나의 에고 수준에, 남편의 그 수준에, 나라도 살아야 했었다. 나라도 살아야 그 다음에 아이를 돌볼 수 있을 테니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서른 넷의 내가 딸과 함께 사무실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던 그 순간은 참 소중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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