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딱지와 아내
설 연휴가 끝나고 뒤늦게 부모님 댁을 가기 위해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육지에 오자마자 느낀 건, '제주도 공기가 참 좋았구나'였습니다. 육지에 올라오자마자 코딱지가 잔뜩 생기네요. 희한하게 제주도에서는 코딱지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굳이 궁금하지 않을 이유를 잠깐 분석해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공기가 깨끗하고 둘째는 습하다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매일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는 행위는 소소한 저의 즐거움입니다. 그럼에도 집안에 먼지가 거의 쌓이지 않습니다. 창틀도 깨끗하고요. 그런데 습도가 이상합니다. 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습도가 80%까지 올라갑니다. 한여름도 아닌데 이 정도입니다. 제습기를 안 사용할 수 없더군요. 어쨌든 먼지 없는 촉촉함이 제 코딱지가 자라나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후비적 후비적)
도시에 오니 정신이 없습니다. 창문만 열어도 뭔지 모를 소음이 끊임없이 윙윙 거립니다. 주변은 온통 회색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요. 제주도 집은 정말 적막하거든요. 그 푸르른 고요함이 참 좋습니다. 옆에서 이딴 소리를 하니 아내가 고작 한 달 살아놓고 유난 떤다고 뭐라고 합니다. 평생을 도시에 살았는데, 한 달 동안 살았던 제주도에 더 정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금사빠처럼 그냥 잠깐의 설렘인 걸까요? 좋아하는 것에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사랑이 너무 금방 식지 않게 너무 오버하진 말아야 될 것 같습니다.
저한테 뭐라고 하지만 사실 아내가 제주도를 더 좋아합니다. 제주 공항에서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제주행이라니 믿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왕복 티켓에서 마지막 종착역은 항상 김포 공항이나 인천공항이잖아요. 그런데 저희의 종착역은 제주공항이 됐습니다. 잠깐의 육지 여행을 끝으로 다시 저희는 제주로 돌아갑니다. 여행이 결코 끝나지 않는 그 느낌이 무척 좋습니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우리 부부가 진짜 좋아하는 장소에서 살게 됐습니다. 보통은 자신이 진짜 살고 싶은 장소에서 살기보다는 그냥 어떤 이유 때문에 그곳에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태어난 곳, 부모님이 사는 곳, 학교를 다니던 곳, 직장을 다니던 곳, 그런 곳에서 대부부의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뉴질랜드라는 곳도 선택해 봤지만 그곳은 사실 저만의 로망이 담긴 곳이었습니다. 아내는 그곳을 조금 무서워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 광활한 대자연이나 색다른 문화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내는 아기자기한 제주의 자연과, 특별함이 담겨있는 제주의 문화를 좋아합니다. 아내가 좋아하니 저도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지난 1월에 저희 부부는 결혼 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참 재미있는 삶을 산 것 같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신혼을 보내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지금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제가 아내에게 명품을 사주거나 값비싼 식당이나 호텔에 데려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 아내를 기쁘게 해주지 않나 합니다. 남들 다 하는 뻔한 것 말고 우리만의 색깔을 가진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 말입니다. 남들 해외 한 달 살이 같은 거 하는데 우리는 그냥 통 크게 뉴질랜드도 살아보고 제주도도 살아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아내는 점점 새로운 것들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아내는 자신이 교사를 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사라는 정체성, 그리고 그 정체성 때문에 자신이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정사에서 신부에게 점수를 매기듯 말입니다. 저는 아내가 교사를 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아내에게 교사를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가스라이팅? 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교사라는 직업이 주는 장점이 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아내가 괴로워하는 건 싫습니다. 그냥 아내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요. 물론 현실적으로 서로가 희생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전 항상 응원하고 지지해 줄 것입니다.
결혼 전에 아내에게 프러포즈 하면서 편지를 써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이야기했듯이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를 구속하는 게 아닌, 서로를 더 멋지고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된다고 생각해. 함께 하는 동안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거나 하고 싶은 꿈을 펼치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힘들 때 기대고, 기쁠 때 함께 웃고, 도전할 때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이런 게 이상적인 배우자의 모습이 아닐까? 나로 인해 네가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아내가 제주도에서 조금 더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리고 제 아이도요. 얼른 제주행 비행기를 타러 가고 싶네요. 코딱지가 자꾸 생겨요.(후비적 후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