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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 만난 진상

by 삽질

얼마 전 여느 때처럼 아이를 등원시키기 위해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갔습니다. 마침 다른 어머님 한 분도 자녀와 함께 어린이집 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문이 활짝 열리자 그 아줌마는 인사도 없이 톡 쏘는 말투로 " 애 오다가 오줌 쌌으니까 기저귀 갈아주세요."라고 선생님께 말을 던졌습니다. 순간 저희 부부는 벙찐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말로만 듣던 개진상이다.'는 눈빛을 교환했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차를 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저희는 "진짜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구나..."라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일하는 저희도 개고생하지만 정말 어린이집 선생님들 힘드시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줌마의 태도를 보면서 확실히 교육기관이 서비스 제공 업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소리가 크고 자기 권리를 확실히 주장할수록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더러움이 그대로 녹아있는 모습이었죠. 그 아줌마는 학부모가 아닌 고객으로서 어린이집과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학부모와 어린이집 교사 관계를 넘어서 사람 대 사람으로 어떻게 그런 말투로 지시하듯 말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군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상식적인 예절과 존중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요? 너무나 바빠서 도무지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일까요? 이유야 뭐든 간에 제가 본 장면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 아줌마도 제정신이 아니고요.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 아줌마가 무척 괘씸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성을 사라진 그 아줌마의 인생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본인도 모르잖아요.


초등학교는 어린이집 서비스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점점 더 많아지는 행사, 프로그램, 최신 교육과정도 결국은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한 업체의 노력이라고 봐야겠죠. 제가 있는 학교는 IB교육을 한다고 시끌벅적합니다. 작년에 80%가 넘는 교사들의 반대에도 교장은 강행을 했다고 하더군요. 교사들의 많은 불만과 반발 속에서 과연 본질적인 교육의 성과를 이끌어낼지 의문입니다. 실제로도 많이 삐걱이는 모양새고요. 결국 지금의 상황도 학교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만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교장의 개인적인 욕심도 크겠지요.) 언제부터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원리가 교육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작 중요한 교육적, 인간적, 상식적인 논의는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줌마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아내가 아이를 하원시키기 위해 어린이집에 갔을 때 또 그 사람을 또 만났다고 하더군요. 어린이집 밖으로 나온 아줌마가 자기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자 아이를 몰아세우듯 말을 쏟아내더랍니다. "선생님이 또 금쪽이 먹기 싫은 토마토 먹으라고 한 거야? 그런 거야? 그래서 지금 기분이 이렇게 안 좋은 거야? 또 억지로 먹였어?" 아이는 정작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짜고짜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듣고 싶기라도 한 듯이 질문을 퍼부었다고 하더군요. 그 아줌마는 왜 그렇게 심사가 단단히 꼬였을까요? 어린이집에 그런 불신이 왜 생겼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마 모든 불편한, 힘든 상황으로부터 자식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 아줌마도 그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겠지요. 굳이 미화를 하자면 꽃길만 걷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초래한 해프닝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프닝이 반복되면 결국 부모와 아이에게 모두 비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만 키워야 하는 강박이야말로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실패'와 '고통'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꽃길만 걸으며 승승장구하더라도 아주 작은 실패에 마음의 문을 닫고 완전히 무너지는 아이들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실패가 싫어 도전 자체를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고요. 인생에는 결코 꽃길만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꽃길을 만들어 줄 부모가 평생 내 옆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해야 하는 건 무균실이 아니라 면역력인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말과 행동 그리고 감정을 그대로 모방하고 학습합니다. 엄마가 어린이집에, 그리고 선생님께 갖는 불신과 불편한 감정을 아이도 그대로 느끼고 학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가 학교에서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지 벌써 상상이 됩니다. 어쩌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또 다른 학부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현명한 부모라면 그리고 진정으로 본인의 자식을 생각한다면 남에게, 특히나 선생님에게 절대로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전에 꽤 괜찮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어른이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장 눈앞의 손해가 싫어서, 기분이 나빠서, 내 아이를 위해서라는 잘못된 신념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한 그 아줌마에게 저는 소심한 복수를 하기로 했습니다. 어린이집 어머님, 아버님들을 뵈면 저는 인사를 건넵니다. 하지만 그 아줌마한텐 절대 인사를 안 하려고 합니다. 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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