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공감이 아니라 권위있는 훈육이어야 합니다.
놀이터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재미있는 장면을 보곤합니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이지만, 육아하는 부모로서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으면 무척 흥미롭습니다.
연년생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형은 5살 동생은 4살이지요. 어느 날 동생이 간식 껍데기를 까르르 웃으며 바닥에 휙 던지더군요. 아이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인 모양입니다. 금세 엄마가 다가와 아이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합니다. "누가 지구 지킴이가 될래요? 누가 저 쓰레기를 주워서 지구를 깨끗하게 만들어볼까요?" 제 머리에서는 도무지 나오지 못할 창의적인 화법으로 아이에게 쓰레기를 줍도록 유도하기 시작합니다. 아이에게는 이또한 새로운 장난입니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설득하고 있자니 쓰레기 줍기가 아니라 꼬리잡기 게임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엄마가 주우시더군요.
"빨리 쓰레기 주워, 쓰레기 함부로 버리면 안 돼!"라고 한 마디면 끝날 일이 이렇게 즐거운 놀이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엄마의 따뜻한 배려가 만든 웃픈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 '규칙'을 배우지 못했고 엄마는 아이에게 엄격한 훈육을 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한순간에 정말 중요한 가치가 휘발됐습니다. 그렇다고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더 나아진 것도 아닐 테지요. 아마 아이의 고집과 엄마의 설득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생길 것 같은 예감입니다.
비슷한 장면은 더 있습니다. 한 여자 아이가 갑자기 벤치에 있던 비눗방울 총을 집어서 놀려고 합니다.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덥석 집어버렸죠. 아이 엄마가 여기서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안돼, 남의 것을 만지면 안 돼. 내려놔"라고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게 손도 못 대고 쩔쩔매며 "내려놔줄래요? 네 것 아니잖아요."라고 부탁을 하고 계시더군요. 아이는 눈도 안 마주치며 "싫어"라고 단호하게 엄마에게 호통을 칩니다. 결국에 놀이터 몇 바퀴를 뒤따라 다니다 아이가 제자리에 두고 나서야 사건이 마무리되더군요.
어쩌다 아이가 엄마를 훈육하고 엄마는 아이를 설득을 하게 됐을까요. 아이의 감정이 다칠까 봐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이 금기라도 된 것일까요. 물론 모든 엄마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시는 건 아니지만 놀이터에서 엄격한 훈육을 하시는 분을 저는 딱 한 분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유치원 교사였던 어머님이셨죠. 아무래도 그분은 공부를 하셨거나 아니면 경험적으로 훈육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계셨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사실 저 또한 훈육에 대해 무척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제가 교사를 시작하던 시기(2015년)부터 점점 학생들의 인권, 감정이 중요시되면서, 훈육보다는 마음 읽어주기, 감정 돌봐주기 처럼 감정에 공감하는 사회정서학습이 강조됐습니다. 그리고 폭력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훈육은 점점 주류 교육방법에서 멀어지며 구시대 유물이 됐습니다. 제가 훈육에 회의적이었던 이유도 초, 중, 고를 거치면서 겪은 교사들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그리고 제 자녀에게는 그런 권위적인 폭력(훈육)을 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던 것이죠.
하지만 훈육이 사라지고 공감이 우리 사회를 차지하면서 그동안 존재 하지 않았던 너무 많은 문제들이 불거지는 것을 저희는 실시간으로 봤습니다. 최근 읽었던 '부서지는 아이들'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접하면서 제가 놓치고 있었던 중요한 퍼즐을 찾게 되습니다. 권위적인 훈육은 사라져야 하지만 훈육 자체가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권위가 함께 하는 훈육은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에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훈육은 아이들에게 명확한 길잡이를 제공해 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감정을 공감해 주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면 아이들은 삶의 기준이 될 나침반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훈육을 통해 배우는 규칙과는 다르게 감정은 결코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죠. 감정은 변덕스럽기 때문에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을 하면 제대로 된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감정을 기준삼아 살아온 아이들은 커서 극단주의 단체에 가입할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극단주의 단체는 매우 명확한 목표와 지향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감정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명확한 지침과 따뜻한 사랑인 것입니다.
훈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학교에 와서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규칙이나 원칙과 상관없이 본인이 기분이 나쁘면 사과를 받아야 하고, 하기 싫은 마음이 들면 회피하고 포기합니다. 규칙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공감이 먼저라고 배웠기 때문이겠죠.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셨냐고 담임교사를 몰아세웁니다. 훈육을 가장한 폭력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사랑을 가장한 공감 중심 육아 또한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아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건 사랑이 담긴 명확한 규칙과 행동요령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칙과 질서가 확고히 자리 잡혀야만 아이들의 정서는 안정될 수 있습니다. 따뜻하지만 엄격한 훈육이 상식이 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