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아내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의 삶에 우리를 너무 맞추지 말자고요. 우리의 삶에 아이를 맞추는 게 올바른 순서라고요. 아이 때문에 저희가 가진 색깔을 잃지 말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저희가 전혀 다른 색을 가진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요. 아이가 태어나니 제가 지키고 싶었던 고집스러운 색깔은 자연스럽게 변해갔습니다. 희생을 한 것도 아니고, 억지로 아이에게 맞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들어갔습니다. 기꺼이 물들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아이를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로 저희의 삶을 채운 지금, 오히려 더 행복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선물 같은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게 저희의 일상이 됐습니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식들을 위해 본인의 삶을 헌신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 때문에, 책임감 때문에, 행복감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종종 들려옵니다. 아이가 성장해서 떠나고 본인을 잃었다고요. 그렇게 애썼는데, 결국엔 남는 건 별게 없다고요. 아이가 원하는 대로 크지 않은 것이 자신의 실패인 것 같다고요.
문뜩 아이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의 삶에 매달린 균형추를 저희 쪽으로 당겨와 기울기를 맞출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색깔을 찾고 아이가 우리의 색깔에 물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아이가 경험하는 세상은 지니가 존재하는 마법의 세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를 위해 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소에 가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먹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아이가 불편하면 해결해 주고 아이가 좋아하면 더 많이 해줍니다. 아이는 불편함도 좌절감도 실패도 고통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면서 살아갈 수 없음을 일찍 배우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른들의 진짜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 체험관을 다니는 게 아니라 진짜 미술관을 가고, 청소년 도서를 읽는 게 아니라 진짜 고전을 접하고, 어린이 풀장이 있는 호캉스가 아니라 진짜 모험을 떠나고, 어린이 돈가스를 먹는 게 아니라 어른들의 푸짐한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과거의 어린이들은 진짜 세상에 살았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배려나 맞춤형 서비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요리교실에 등록할 필요 없이 진짜 음식을 만들며 요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파편화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익히며 생존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아이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마음, 아이가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좋은 마음이 어쩌면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 아이를 점점 그 삶에 녹여내는 것이 부모로서의 역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더 사랑하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힘든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