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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만 먹는 아이들

by 삽질


제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몇몇 부모님들과 대화를 나눠보면서, 자녀들이 몇 가지 선호 음식을 빼놓곤 다른 음식을 잘 먹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제 아이 또래(4세) 남자아이들의 주식은 돈가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입이 짧고 밥을 잘 안 먹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까요? 아이들이 이유식을 먹는 시기부터 음식에 대한 성향과 선호가 천차만별인 걸 고려하면 선천적인 요인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들의 태도나 환경의 변화가 아이들의 식습관을 바꾼 건 아닌지 합리적으로 의심해봅니다.


아이가 어린이집 하원 후에 놀이터나 아파트 키즈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됐습니다. 아이들이 하원 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부모님들이 싸온 간식을 먹는 일입니다. 과일부터 젤리, 과자, 빵, 견과류 등 간식의 종류는 아주 다양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간식을 마치 뷔페처럼 고르곤 합니다. 한 어머님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을 대여섯 가지 준비해서 원하는 간식을 그때그때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이는 마치 간식 심의를 하듯이 엄마가 제시하는 음식을 안 먹는다고 짜증스레 패스하고 결국엔 가방을 뒤져 자기가 먹고 싶은 간식을 빼먹습니다.


식사 시간에도 비슷한 일을 일어납니다. 아이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엄마는 새로운 음식을 다시 만들어 줍니다. 아이는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내면 새로운 음식이 나온다는 걸 학습하기라도 한 듯합니다.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음식의 섭취 난이도는 낮아집니다. 점점 자극적이고 맛있는 음식이 준비되는 것이지요. 결국에는 소시지나 돈가스 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마무리 합니다. 이마저도 먹지 않으면 엄마는 아이를 따라다니며 음식을 직접 입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뭐라도 먹이고 싶은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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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외식거리는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도 부모도 쉽게 인스턴트 음식과 자극적인 간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이와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을 가곤 합니다. 수많은 프랜차이즈 식당과 디저트 가게 그리고 편의점 숲에서 유혹을 견디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발자국 걷고, 침 삼키고, 정신 차리고, 다시 한 발자국 걷고, 입맛 다시고, 머리 박고를 반복하고 있으면 무슨 음식 참기 챌린지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정말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결국 아이와 저는 붕어빵에 무너지곤 합니다. 산책을 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는 간식이나 음식 봉지를 보면서, 정말 편리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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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또 어떤가요. 아이들은 무료급식을 받습니다. 아이들에게 음식은 산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당연히 존재하고 당연히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음식은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먹고 싶은 음식만 쏙 골라 먹고 나머진 버리곤 합니다. 교사가 음식을 다 먹지 않았냐고 핀잔이라도 주면 아동학대가 될 수도 있으니 잔소리도 못합니다. 급식은 점점 건강식이 아닌 선호식으로 바뀌어 갑니다. 아이들의 급식 만족도 조사를 무시할 순 없으니까요. 음식물 쓰레기를 만드는 것보단 뭐라도 애들이 먹을 수 있는 걸 주는 게 모두에게 좋으니까요. 수다날(수요일은 다 먹는 날)에 우동, 로제 떡볶이, 주먹밥에 음료수까지 나오는 걸 보면서 헛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탄수화물이 95%는 되는 것 같습니다.(너무 맛있게 먹는 제가 싫어집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과거에는 음식이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 아버지 세대는 훨씬 그랬지요. 음식을 선호해서 먹는 게 아니라 있으니깐 먹는 것이었습니다. 있을 때 안 먹으면 먹을 수 없으니까요. 음식에 대한 결핍이 있었기에 음식을 귀하게 여겼고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 또한 음식에 대한 어느 정도 결핍이 존재했지요. 어렸을 적 저는 외식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맛이 있든 없든 엄마가 해주신 음식을 먹었고 제가 원하는 음식을 달라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없었습니다. 원치 않은 쌍욕은 종종 얻어먹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고 형편이 나아지면서 점점 맛있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더 선호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부모들은 어느 때보다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음식에 있어서도 그렇고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풍족함과 부모의 사랑이 아이의 식습관에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선택지 때문에 오히려 음식다운 음식은 외면당합니다. 간식으로 채워진 배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만을 찾습니다. 점점 더 악순환은 심해지고 돈가스로 연명하는 아이들의 수는 늘어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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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선 어쩌면 편안함이나 풍족함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요. 불편함이나 결핍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고요. 우리 삶의 굴곡을 평탄하게 해주는 수많은 서비스나 기술이 어쩌면 우리가 꼭 학습하고 경험해야 하는 삶의 본질을 침해하고 있다고요.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독이 될 수 있다는 의심을 항상 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음식을 경험하는 환경과 방식처럼 말입니다. 맛없지만 건강한 음식을 먹기 위해 선택지를 줄이고, 먹지 않는다면 배고픔을 느낄 수 있도록 두는 편이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길이 맞는 길일 때가 많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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