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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간 안에서 걷기

by 삽질


아침 일찍 동네 뒷산을 오르고 내려오니 정자가 보여서 쉬고 가기로 했습니다. 놀아주기 살짝 귀찮은 마음이 들어 아이에게 정자에 놓여 있는 빗자루로 정자를 청소하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했는지 신나게 비질을 하며 혼자 싱글벙글입니다. 공연하듯 자신의 몸짓을 자랑하기도 하고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붓습니다.


"성문 앞에서 빗자루처럼 생긴 창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왜 가만히 있어?"

"성을 지키는 사람이라서 그래."

"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

"왜?"

"그냥 그런 거야..."


성의껏 대답하다가도 어느 순간 지겹고 귀찮은 마음이 끼어듭니다. 적당히 말을 자르고 이제 그만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아이는 싫다고, 조금 더 놀고 싶다고 합니다. 여기서 쉬자고 한 사람도 저고 가자고 하는 사람도 저입니다. 아이는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죽 끓듯 한 제 변덕 때문에 아이는 꽤나 성가실 것 같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화내는 법은 없습니다. 저 같은 친구가 제 옆에 있었다면 친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적당히 놀았는지 이제 가려는 찰나, 옆에 보이던 말라비틀어진 대나무를 발견하고 낙엽 더미 안으로 들어갑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고 신기한지 아이는 이리저리 살펴보고 저한테 자랑도 합니다.


"우. 와."


마음에도 없는 기계적인 감탄사로 아이에게 장단을 맞혀 주니 눈치 없이 더 좋아합니다. 아이를 속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문득 내가 너무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가자고 재촉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더 놀다 가자고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성급한 생각을 내려놓고 아이를 자세히 보니 아이처럼 저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아이가 호기심 있게 바라보던 낙엽과 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리고 아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이 저의 것과는 꽤나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의 시간에 내 시간을 양보할 수 있는 여유와 인내심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와 함께 걸을 때도 저는 아이의 속도에 맞추다가도 어느새 제 속도에 맞춰 아이를 잡아당기듯 걸어가곤 합니다. 아이는 길을 가다가 몇 번이나 경로를 이탈하고 주변을 살피고, 뭔가를 만지고, 놀고 싶어 합니다. 항상 목적지와 예상 도착시간이 있는 저와는 다르게 아이에게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중요하지만 아이는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아이는 오로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재만 살아갑니다. 현재를 관찰하고, 현재를 듣고, 현재를 느낍니다. 저는 몸만 현재에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항상 지금을 벗어나 어딘가를 둥둥 떠다닙니다. 그래서 아이가 답답하게만 느껴집니다.



아이보다 항상 빠른 발걸음 때문에 먼저 걸어가고, 다시 뒤돌아 아이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게 일상입니다. 아이의 속도에 맞추는 일은 현재로 저를 다시 데려오는 일입니다. 아이와 함께 현재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와 함께 현재에 살아야겠습니다. 아이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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