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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Sep 18. 2023

우리는 경주하듯이

시시콜콜한 경주기행 7




대웅전 ,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불자들은 기도에 열중이. 연로한 신도들이 만들어내는 투명하고도 두터운 경건함이 행여라도 관광객들의 호기심으로 깨어진다면 안 될 것만 . 믿음이 눈으로 보인다면 이런 모습일까. 사찰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색이 바래 나무의 속살이 훤히 드러난 단청과, 그 모습을 닮은 불자들은 번뇌를 떨치려는 듯 마음을 하나로 모아 장엄을 이루고 있었다.



대웅전의 계단을 내려와 불국사의 마스코트 같은 두 탑 사이에 서서 닮은 듯 다른  잠시 바라본다. 한국인사랑하는 남매 같은 두 탑.


석가탑과 다보탑은 1962년 각각 국보로 지정된 탑으로, 크기는 비슷하나 외형적인 특징은 다르다. 하나는 남성적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적인 탑이라 남매 같다는 말을 꺼냈는데, 다보탑은 화려하며 우아한 여성이 연상되고 석가탑의 단아하며 안정된 느낌은 남성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잠시 내 아들과 딸을 이들에게 대입해 본다. 흠.... 어느 부분도 탑의 묘사와 일치하질 않는 것을 보니 성별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대폭 수정해야 할 것만 같다.      


방문 때마다 국보 둘을 앞에 두고도  석가탑 앞에서 머문 시간이 길었다. 이는 예술성의 문제가 아닌 개인적인 취향 다.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외형의 단순함도 좋지만, 실은 석가탑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좋아했기에 바라보는 동안 내 생각은 아득히 먼 과거까지도 떠날 수 있었다.





90년대, 지독한 사춘기를 앓았던 나의 고등학생 그 시절. 3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나는 동아리를 바꾼 일도 없이 도서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학년 초엔 어디서나 그렇듯 다른 동아리의 가입 권유가 종종 있었으나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로 부서를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속내 정년을 코앞에  담당선생님이 활동에 개입을 거의 안 하신다는 것이 큰 매력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솔직한 선택의 이유로는 후자가 더 사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축제다 뭐다로 정신없이 바쁠 때 도서부원들은 도서관에 앉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됐다. 만사가 귀찮았내겐 이보다 좋은 동아리는 없었다. 동아리 활동은 요식행위, 축제는 한가한 녀석들의 파티일 뿐이라 여겼나는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엎드려 자거나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내가 도서부의 부장이 될 무렵, 전국적으로 모든 도서관의 대출카드가 바코드로 교체되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워낙 새로운 일이라 전문성이 부족한 교사들을 돕기 위해 지역의 대학교에선 각급 학교로 실습 교생들을 파견했었다. 그때 졸업을 앞둔 문헌 정보과의 대학생이 우리 학교로 실습을 나왔었다. 무려 두 명의 여대생이.



오자마자 남고의 아이돌이 되었던 누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는 그때를 황량했던 고등학교 시절 중 가장 좋았던 시기로 추억한다. 그들은 내가 듣기 싫은 수업을 미리 귀띔해 주면 수업 중 선생님들께 양해를 구해 자료정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빼내 주기도 했다. 배가 아픈 아이들의 야유를 뒤로하며 따라나섰던 복도가 얼마나 황홀한 꽃길 같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매점까지 데려가 간식도 사주고 나와 함께하는 도서정리보다는 수다 떠는 일을 좋아었던 그들이 나는 참 고맙고도 좋았다. 그런데 왜 석가탑을 이야기하다 말고 묻지도 않은 나의 고교시절 회상씬이 필요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나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읽어보라며 권해줬던 책이 현진건의 무영탑이었기 때문이다. 석가탑의 또 다른 이름 무영탑.


수능을 봐야 했던 나는 공부를 통해 무영탑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알고 있었으나 전체를 읽어본 적은 없었다. 18세의 소년에게 무영탑은 너무나도 올드하지 않은가. 하지만 좋아하던 누나가 알듯 말듯한 미소로 건네준 책을 어찌 홍안의 소년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혹시라도 소감을 물어볼까 봐 쉬는 시간마다 책을 펼쳐 보았다. 막상 읽어보니 기대 이상으로 몰입하게 되었던 부여의 석수 이야기에 그날 하루가 온통 무영탑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아사달과 아사녀 그리고 구슬 아가씨의 엇갈린 사랑이야기를 말해주고 싶었을까.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했던 나는 가슴 아픈 사랑에 공감하기보다는 바보 같은 사랑에 답답해했고, 외려 아사달의 마지막 모습에만 오래 붙잡혀 있었다.


'아사달은 대체 아사녀가 빠졌던 못가에서 무엇을 조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본의 아니게 구슬 아가씨 주만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아사달은 아사녀의 죽음으로 큰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용서받을 길이 없던 그는 흔들렸던 자신의 마음을 붙잡으려 못가의 돌에 아사녀를 새기려 한다.


하지만 주만의 모습과 아사녀의 모습이 겹쳐 망치질 한 번 시작할 수 없던 그는 어느 순간의 깨달음으로 부처의 모습을 조각하게 된다. 현진건은 지극히 세속적인 번뇌를 하던 아사달에게 깨달음이라는 길을 터주었다. 그 당시엔 소설의 결말을 수능에서 요구하는 답 정도만 암기하고 있었을 뿐 나는 그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진 못했었다..





불국사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와 종각 옆편에 있는 매점에 들렀다. 지난 방문 시기도 8월의 한여름이었는데 얼음물이라도 사려다 우연히 먹어보았던 소프트아이스크림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던 불심도 절로 생기는 극락의 맛이랄까.


우린 매점 앞 벤치에 앉아 바닐라와 초코가 반반 섞인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반응이 어떨까 궁금한 마음에 쳐다보니 그들은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는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친구들의 정신을 불국까지 편도로 보내준 것 같아 추천한 내 어깨엔 뽕이 잔뜩 들어갔다.




어느덧 모든 비구름이 걷히고 쏟아지는 햇살만큼 빛을 발하는 불국사를 바라본다. 부여의 석공 아사달. 사랑하던 두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다 그가 깨달았던 것은 결국 예술가로서의 소명이었을 것이다.


당대에 인정을 받던 조각가였어도 그의 나이는 어렸다. 기술이 극에 달했다 하더라도 예술가는 자신을 작품에 녹여낼 수 있어야 예술가, 즉 장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외는 그럴듯한 쟁이가 될 수 있을지언정 예술가는 아닌 것이다.


자신까지 녹여내기엔 아직 경험이 일천했던 아사달은 자신의 인생이 온통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마지막 조각이 부처의 모습이라 표현됐지만 그것은 예술가가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   The moment. 2023.09. J.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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