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광현 May 30. 2024

달리기와 흙길과 바람과 그림

일상 드로잉

아이들도 늦게 일어나는 주말 아침, 운동복을 챙겨 입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늘 피곤에 절여져 있어도 달린 후에는 활력이 생긴 것을 느낀다. 그 힘으로 반나절은 애들과 잘 놀아주는 아빠가 될 수 있으니 아내도 남편의 달리는 시간을 배려해 준다. 단 둘째와 함께 낮잠을 자야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내 달리기의 허점이다.


새로운 러닝화를 신고 달려보니 관절에 부담이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평소 내가 신던 러닝화는 별생각 없이 좋아하는 메이커의 예쁜 신발을 구입한 것인데, 친구들의 의견은 달랐다. 애 아빠 관절 생각하라며 돈을 모아 좋은 신발 하나를 생일 선물로 보내줬다.


그들 덕분에 내가 일 년간 애용하던 신발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아직 멀쩡한 신발이지만 이제는 궂은날에만 쓰일 것이다. 미안함에 아내의 흰 신발을 세척해 준다는 구실로 녀석까지 깨끗하게 씻겨주곤 잘 말려 신발장에 넣어두었다.


천천히 길 위를 달리며 새들과 인사하고 푸른 잎사귀들을 눈에 담으며 러닝의 마지막 코스로 들어섰다. 한적한 집 앞 공원은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마지막으로 도는 곳이다. 돌다 보니 한 주 사이에 모르던 길 하나가 생긴 것이 보였다. 숨도 고를 겸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맨발 걷기 길이라 쓰여 있었다. 요즘 유행이라는 얘기는 들었으나 이렇게 빨리 집 앞에 생길 줄은 몰랐다.


뜨거워진 발도 식혀줄 겸, 양말을 벗고 신발은 뒷짐으로 지며 나무가 우거진 소로로 들어갔다. 해가 들지 않는 황톳길은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차가웠다. 발에 닿는 딱딱함 위로 느껴지는 점성은 내가 밟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걸음마다 상기시켰다.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드러누운 햇빛과, 유독 잘 들리는 새소리는 이곳을 바깥세상과 분리하고 있었다. 바람도 그늘과 하나인 듯했다. 땀이 흐르던 목덜미는 수분이 증발하며 금세 시원해졌다.


발밑에 둔 시선을 돌려 길 끝을 보았다. 나무들과 길은 서로 가상의 선을 이어가며 소실점 하나를 만들고 있었다. 1점 투시로 쉽게 묘사될 수 있는 이 길을 보니 오랜만에 캔버스를 들고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다'라는 말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생각한다는 뜻도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을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그린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내 주된 관심사는 아이들이 되었다. 매일 성장하는 아들과 딸의 모습을 글과 그림에 담으며 고단한 시기도 웃으며 보냈다. 평화로운 고요 속에서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내 일상의 모든 이야기는 전부 아이들의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나도 몰랐던 나는, 순간을 붙잡고 있었다.



세족장에 앉아 물로 발을 닦았다. 시계를 쳐다보니 너무 여유를 부린 것 같다. 아이들이 일어날 시간이었다.        



선물



  







    


                   

    

이전 02화 다음은 네 차례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