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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광현 Jul 02. 2024

장모님의 네잎클로버

일상 드로잉

장모님 댁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지만 운전을 못하시는 장모님에겐 지하철 두 번은 갈아타야 올 수 있는 번거로운 곳이 우리 집이다.


아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 후부터는 매주 딸이 사는 집으로 찾아오신다. 출가한 자식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위조차 쉽게 알 수 있다.    


오실 때마다 아이들 음식을 잔뜩 만들어 주시니 아내가 많이 의지하는 것이 보인다. 평소엔 양손 무겁게 식재료를 들고 오시는데, 이번엔 웬 풀때기를 들고 오셨다. 무엇인지 여쭤보니 오는 길에 꽃밭이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눈에 띄는 네잎클로버 세 개를 따왔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놀라워하는 내게 아내와 닮은 미소로 농담을 건네셨다.


"아니, 울 사위는 그 흔한 네잎클로버도 못 찾는가?"    




내 어릴 적 친구들은 네잎클로버를 찾으면 학교까지 들고 와 교실을 순회하며 자랑했다. 한 번도 네잎클로버를 찾은 적 없던 나는 구경만으로도 금세 들썩였다. 그 희귀하다는 네잎클로버를 찾은 녀석들은 아이들에겐 영웅이자 모험가였다. 가져온 녀석들마다 이건 행운을 불러온다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뤘다. 친구들은 더욱 만져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나 또한 한 번만 만져보자며 영웅들에게 애걸했고, 친분으로 겨우 만져본 네잎클로버는 신비 그 자체였다.      


나는 종종 부러움을 견디지 못해 직접 행운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은 늘 빈손이었다. 진짜 네잎클로버가 있기는 한 건지, 내 눈엔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괜히 세잎클로버들을 발로 차며 투덜댔어도 아쉬움에 시선은 발아래에서 떨어뜨릴 수 없었다. 쭈그려 앉아 찾아봐도, 곁눈으로 훑어봐도 없는 건 없는 거였다. 나는 행운의 표상을 찾을 수 없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그 시절 한참 유행했던 껌 포장지 속 네잎클로버라도 당첨되길 바랐다. 그 또한 아이들에겐 지금의 포켓몬 스티커처럼 인기였기 때문이다. 매번 슈퍼에 갈 때마다 껌을 사봐도 네잎클로버는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속설이 사실이라면, 난 지독히도 운이 따르질 않는 아이였다.        




장모님이 주신 세 개의 네잎클로버를 말리기 위해 넓은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잘 건조한 후 학교에 있는 기계로 코팅했다. 가위로 잘라내 모양을 잡으니 제법 봐줄 만했다. 마침 쓸만한 책갈피가 없어 필요한 참이었는데, 좋은 책갈피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장모님께 모양이 예쁘게 잡힌 네잎클로버 하나를 드렸다. 아직 소녀 같은 미소를 지니신 장모님은 사위가 예쁘게 코팅했다며 웃으며 고마워하셨다. 아내에게도 한 개를 나눠준 뒤 남은 것은 요즘 내가 읽는 책에 끼워두었다. 두꺼운 책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네잎클로버를 보니 한때는 이들이 풀과 나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이렇게 다시 만나는구나.'           



일상을 글로 담다 보니 평소 눈에 띄는 소재는 없는지 유심히 주변을 살펴본다. 하지만 특별한 글감을 찾아내는 재주가 내겐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평범하게 사는 사람은 여전히 네잎클로버를 찾질 못한다. 이미 커버린 나는 애먼 바닥을 발로 차며 투덜대는 대신, 일상의 세잎클로버들을 글로써 어루만진다. 반복되는 일상이 늘 같은 모양처럼 보여도, 생각을 내밀어 더듬다 보면 감정의 색상과 크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검색 엔진으로 살펴보니 세잎클로버의 꽃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변한 세상만큼이나 주목받지 못했던 평범한 것들이 관심받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영화에서도 조연이 각광받는 세상인데 클로버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행운의 의미를 지닌 네잎클로버와는 달리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네잎클로버를 관찰하다 허릴 숙여 총알을 피한 나폴레옹에겐 행운이, 평범함으로 뜯기지 않고 모여 살 수 있는 세잎클로버에겐 행복이란 꽃말이 어울린다. 나는 행운만 좇아다니다 행복을 몰랐던 시절이 떠오른다. 글을 읽고 있는 그대에겐 행복이 무엇인가?        








오늘 저녁 있던 일이다. 내겐 토끼 같은 딸이 토끼 인형을 안고 오빠를 괴롭히다 아내에게 혼이 났다. 나는 우는 아들을 달래주고, 아내는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딸을 진지하게 혼냈다. 아들을 달래주다 두 모녀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혼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는 아들은 아빠에게 웃지 말라고 더 서럽게 울었다. 아내는 애 혼낼 때는 웃지 말라고 나까지 혼을 냈다. 태세를 바꿔 혼나던 딸도 합세해 아빠에게 웃지 말란다. 셋이서 나 하나를 두고 으르렁대니 머쓱했다. 덩치 큰 아빠도 사나운 토끼 에겐 먹잇감일 뿐이다. 에잉, 토끼 같은 녀석들. 토끼풀, 네 가족...?         


 

힝. 나 삐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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