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만 감정 끌게요.

꼰대에게 배운 한 가지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세상에,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꼰대 of the 꼰대.

사실 난 운이 좋아서일까, 나름 인복이 있어서일까. 뉴스나 인터넷에서 보는 그런 심한 상사나 고객, 동료를 만난 적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음.. 이렇게 쓰다 보니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이들과 오히려 잘 지내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참, 오랜만이어서였을까. 당황이 하늘을 찔렀고 이건 뭐 어찌 상대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일을 하다 보면 회사 내부의 사람과 부딪히는 경우가 생긴다. 같은 소속의 동료와. 그런 경우는 사실 웬만하면 잘 풀어내고, 이해하고 잘 해결하고 넘어가면 된다. 나도 상대방도 앞으로 계속 볼 사이이기에 서로에게 잘하는 것도 있고, 같은 회사 사람이다 보니 그 회사의 결에 맞는 비슷한 사람을 대표님이 뽑아놔서일까, 신기하게 다들 나와 잘 맞고 참 좋은 사람들이다.(그들도 그렇게 느껴야 할 텐데)

문제는 외부인이다. 함께 협업을 하는 업체의 직원이나, 우리 회사의 고객 등등. 여러 부류가 있다.

몇 달 전 그날도, 그쪽에서 일이 생겼다.



©픽사베이



그분은 우리 회사와 다이렉트로 일을 할 분은 아니었다. 통해 통해 하면 되는, 그러니까 우리와 협업하는 업체의 고객이랄까. 그런데 나에게 할 말이 많으셨다. 우리 회사와의 일이 전체 업무와 연계가 되니, 그분에게는 이 모든 절차가 부질없게 느껴지신 거였다.


나 - 협력업체 팀장 - 그분


본인은 협력업체와 소통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니, 개인의 성격을 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발휘해버리신 거다.

마음 약한 업체 팀장님은 미안하다며 그 분과의 직접 소통을 부탁했고, 난 그래 봤자 별 일 아니겠지, 그냥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겠지 싶어 '이상하긴 하지만 애써 쿨하게' 알겠다고 해버린 거였다.

"네, 제가 직접 이야기 나눠 볼게요. 금방 해결되겠죠 뭐."




'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날 이후, 이런 후회를 족히 오만 번은 한 것 같다.


그렇게 그 분과 첫 통화를 1시간, 그 후 만남에서 2시간을 소비했고(모두 업무 외 시간) 학을 내가 업체에 '이건 아니다, 소통 방식과 절차를 지켜달라' 표현했음에도 그분은 보란 자신의 방식을 이어갔다. 이 쯤되면 아예 무시하면 되지 않나 수도 있겠지만 그럴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차라리 나나 협력업체 팀장님이 각자 회사의 대표라면 또 달랐을까 싶지만 우린 그저 일개미일 뿐이었고, 어떻게든 이 일을 성사시켜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회사원에 불과했기에.


더 웃겼던 건 퍽 소심한  성격이었다.

평소 우호적인 관계를 무척 중요시하는 나이기에, 상대 회사에도 나름의 컴플레인을 했지만 준비한 만큼 단호한 말투는 나오지 않았고, 생각만큼 화도 내지 못했다. 집에선 그렇게 잘하면서, 이런 매력 없는 회사원 같으니.

어디 드라마 같은데 보면 아주 똑 부러지고, 칼정장의 전형적인 커리어우먼 이미지에 심지어 얼굴까지 예쁜 여주인공이 평상시엔 다정하지만 업무에서만큼은 아주 프로답게 할 말 딱딱하는 모습이 그렇게 당차고 멋있더만. 난 왜 그게 안 되는 건지.

이렇게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나무랐고. 이런 경험들도 다 재산이 될 것도 같아 최대한 참고 정중히 일을 마무리해갔다.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



하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락을 피하자 꼰대는 내게 재차 연락을 해댔고, 절차를 지켜달라 아무리 읍소해도 모른 척을 일관하며 끝내 그 프로젝트는 그의 지휘 아래 모두가 휘둘리며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뭔가 시원섭섭 묘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마친 그다음 날. 띠링-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팀장님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가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고마워요,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미 하루 전 프로젝트를 마침과 동시에 애써 모든 걸 싹 잊고 있는 상태였던 나에게 온 뜬금없는 칭찬과 감사의 문자.

절차 운운하며 그렇게 따져댔는데도 끝까지 본인 스타일을 고수한 꼰대의 문자.

그렇게 욕했던 그가 이제 보니  멋져 보였다. 강단 있게 자신의 업무 방식을 옳다 생각한 꼰대스러움이 결과적으로는 아까 말한 똑 부러진 드라마 속 주인공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도 참, 뭐든 마무리를 좋게 하고자 하는 성격이 쓸데없이 이런데서 적용이 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다정한 답장을 쓰고 있었다.


저도 덕분에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다니 이게 무슨 망언인가. 이 사람은 꼰대라고, 몇 날 며칠 날 그렇게 고생시킨 꼬온대애!




어찌 됐든 그와 나의 관계는 (바라던 대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고, 사실 그렇게 싫다 싫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참 얻은 것이 또 배운 것이 많았던 프로젝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추가로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커리어우먼의 첫 번째 자질, 감정 컨트롤.

업무 상황마다 일일이 대응하며 감정까지 소비하기엔 너무나 큰 에너지가 소모되고, 이 일은 물론 다른 일에도 지장을 미친다. 개인의 감정 상태는 로봇이 아닌 이상 업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나 같은 A형 기질의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회사 내부든 외부든 그 어떤 관계에서도, 마음은 다 하되 사사로운 감정을 끈다면 훨씬 효율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난 AI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 안에 적정 입력값을 넣어두고 업무에 임하는 것이 낫겠다는 진짜 회사원 다운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이었다.

내게 깨달음을 준 꼰대님은 아마 그걸 훨씬 먼저 알고 실천 중인 분이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마음은 다 하되 감정은 끄자."


내가 말했지만 참, 그럴듯하다.

흠, 안 그런가 다들?





이전 12화 대표님이 보고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