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그림자>
아주 먼 옛날, 숲에는 커다랗고 까만 곰이 살고 있었어요.
말수는 적었지만 명령은 많았죠.
“질서를 지켜라.”
“뛰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곰의 목소리는 나뭇가지 끝까지 울려 퍼졌고,
숲의 동물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며 살았어요.
그림자라도 밟히면 그날 먹이를 못 얻을까 봐 눈치를 봤고,
나무 뒤에 숨어 서로의 발소리를 세며 하루를 버텼죠.
그러던 어느 날, 숲에 큰 바람이 몰아쳤어요.
가지가 부러지고 깃털이 흩날렸고
숨죽였던 동물들이 드디어 외쳤어요.
“곰은 내려와야 해!"
"이제는 우리가 말할 차례야!”
곰은 쫓겨나듯이 돌판에서 내려왔고
동물들은 기뻐 날아오를 뻔했어요.
깃털을 펄럭이며 노래한 새도 있었고
“이제는 자유다!” 하고 외친 다람쥐도 있었죠.
그런데 돌판이 비자마자 두 동물이 거의 동시에 나섰어요.
한쪽에서는 뿔을 빳빳이 세운 황소가 발굽으로 땅을 쳤어요.
“이 돌판은 강한 자가 책임져야 해. 내가 나서야 숲이 다시 설 수 있지.”
반대편에서는 등껍질을 멘 거북이가 느릿하게 다가왔죠.
“이 돌판은 나누는 곳이어야 해요. 숲은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거예요.”
황소는 코로 숨을 훅 뿜으며 거북이를 노려봤고,
거북이는 단단한 눈으로 황소를 지켜보았어요.
동물들은 둘로 나뉘어 웅성거렸죠.
누군가는 황소의 힘에
누군가는 거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하지만 그 둘이 서로를 견제하며 망설이는 사이
어디선가 조용한 발소리가 돌판을 향했어요.
“잠시 실례하지.”
그림자 같은 기척.
그 위에 올라선 건, 전에 내려갔던 곰과 너무도 닮은 또 다른 곰이었어요.
동물들은 당황했죠.
“어? 저 곰… 또 올라간 거야?”
“그냥 다시 올라탄 거 아냐?”
곰은 부드럽게 웃었어요.
“걱정 마. 이번엔 다르단다. 나는 너희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숲에 잠깐, 술렁임이 일었어요.
“곰이긴 한데… 말투가 좀 다르지 않아?”
“그래도 웃긴 하네.”
“이번엔 좀 괜찮으려나…”
몇몇은 박수를 쳤고 몇몇은 침묵했어요.
하지만 곧 박수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었죠.
시간이 지나자 동물들은 눈치채기 시작했어요.
곰이 남긴 옛 발자국이 그대로였다는 걸.
순찰은 여전했고
지저귐이 많던 새들은 둥지를 빼앗겼고
‘숲을 시끄럽게 한다’는 이유로 먹이를 못 받는 동물도 있었어요.
그리고 곰은 어느 날 밤, 나뭇가지 위에서 말했죠.
“요즘 숲에 소문이 많구나. 그건 평화를 해치는 일이란다. 자유란, 조용히 있는 거야.”
그 말에 족제비 한 마리가 중얼댔어요.
“말하라더니, 또 말하지 말래…”
작은 고슴도치가 물었어요.
“저 곰… 전에 있던 곰이랑 뭐가 다른 거야?”
다람쥐가 대답했어요.
“다르긴 해. 이번엔 미소도 짓잖아.”
그날 이후로 숲은 다시 조용해졌어요.
하지만 그건 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동물들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동물들은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어요.
“다음엔… 진짜 다른 동물이 올라왔으면 좋겠다.”
올빼미는 그 시절을 ‘그림자의 계절’이라 부르며 가끔 떠올렸어요.
곰은 내려왔지만, 또 다른 곰이 다시 올라왔고,
숲은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였죠.
“달라지진 않았지만, 나빠지지도 않았다.”
올빼미는 그렇게 적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