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아홉살. 몸무게는 28kg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에 성격은 밝고 활동적이어서 짹짹거리는 참새를 연상케 한다.
축구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제2의 호날두가 꿈이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보다 모로코에 대한 애정이 크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모로코-스페인 축구경기에서 모로코가 패하자 눈물까지 보였다.
축구를 향한 야신의 열망은 범상치 않다. 어느날 같이 신발을 사러 갔을 때였다. 남편이 가벼운 아동용 샌들을 보고 좋아보인다며 야신에게 신어보라고 건네자 야신이 대뜸 던진 말이 걸작이었다.
"이거 축구 할때는 못 신잖아요."
야신은 축구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었다. 그 짧은 기간에 비해 실력이 급성장하여 지금은 지역 아이들 축구팀에서 손꼽히는 인재이다. 야신이 축구를 시작한 계기는 모로코에서 남편과 같이 공을 찼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야신은 공을 차본적이 없어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런 야신을 장난으로 놀리며 다리 사이에 공을 통과 시켰다고 한다. 축구에서 상대의 다리 사이로 공을 차서 넣는 것은 '내가 널 갖고 논다'는 의미이다. 그날 야신은 분에 차서 엉엉 울었고, 프랑스에 돌아가 이를 갈며 축구를 연습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축구에 진심으로 흥미가 생겼고 지금은 팀에 들어가 방과후에 훈련을 받고 있다.
야신에게는 목표가 생기면 그걸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집념이 있다. 축구를 비롯하여, 뭔가에 꽂히면 될 때까지 시도하는 성격을 가졌다. 모로코 말인 데리자를 배울 때에도 그렇다. 프랑스에서 쭉 살아왔기에 데리자를 잘 하지 못했었는데, 이를 악물고 연습하여 지금은 형과 누나보다도 뛰어나다.어려운 단어가 있거나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답답함에 눈물을 보이기도 하며 될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한다. 나도 데리자를 배우는 입장으로서 야신이 대견하고 아이지만 존경스럽기도 하다.
처음 만났을 떼에 야신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형인 일리야스와 누나인 이나스를 따라서 몇마디 하기는 했지만, 영어로 소통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데리자나 프랑스어를 못하고 야신은 영어를 못하니, 야신과 단둘이 대화를 하려면 손짓과 발짓, 의성어와 의태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만 있으면 대화 소리가 대충 이랬다.
"어, 음.. 뀨?"
"음... 삐요?"
"삐요?"
"피융?"
"아~ 피융?"
"뀨오?"
그러던 어느날 야신이 갑자기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냥 단어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꽤 정확한 문장으로 말이다. 형이나 누나를 따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따가 같이 바다에 가요."
"오늘 엘자디다의 기온은 24도예요."
"저는 지금 많이 아파요(배탈이 났을 때)."
"무서워요(영화를 보다가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 나는 괜찮아요."
같은 말들이었다.
한달 사이의 변화라고 하기엔 정말 놀라웠다.
야신은 보고 듣는 모든 걸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중에는 한국말도 조금 하게 되었다.
"OO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 "안뇽하쎄용!" "감사합니당!" "싸랑해요!"같은 말들도 곧잘 했다.
또한 야신은 나의 데리자 선생님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단어를 잘못 발음하면 교정해주기도 하고, 새로운 단어를 반복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그덕에 야신과 함께하는 동안 데리자 실력이 크게 늘었다.
야신은 어리지만 남을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하루는 내가 배탈이 크게 나서 아무것도 못먹고 있었다. 그날은 하필 같이 수영을 하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수영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야신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같이 수영을 하려고 며칠째 기다렸던 터라 아쉬워하며 내가 누워있는 소파 주변만 빙빙 맴돌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같이 수영하러 갈래요?"
하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미안해 야신. 약속까지 했는데 못가게 되었네.."
나의 말에 야신은 눈꼬리와 입꼬리가 슬픈 강아지처럼 축 쳐졌다.
"But you promised me(그치만 약속했잖아요).."
그 모습이 너무 너무 너무 귀여웠다!!
'으이그 그러게 왜 쉽게 약속까지 해서 애를 실망시켜!'하며 속으로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도 아쉬웠지만 설사를 하면서 수영장에 들어갈 순 없기에..몇번 안아주고는 달래서 내보냈다.
몇시간 후 누나인 이나스와 같이 수영을 하고 들어온 야신은 아직도 소파에 축 쳐져있는 나를 보고는 다가와서 배를 쓸어주며 물었다.
"쇼이야(좀 괜찮아요)..?"
작은 알감자만 한 손으로 내 배를 토닥이는 모양이 깜찍하고 귀여워서 배가 금방 다 나아버린 느낌이었다. 야신은 정말이지 우리가족 대표 사랑둥이다.
이런 야신을 충격에 빠트린 일이 있었으니.
때는 조카들이 모두 모여 그림을 그릴 때였다. 야신도 종이 하나를 가지고 뭔가를 그리고선 잠시 뒤 나에게 가져왔다.
"이것봐요!"
이것은 누구인가. 사탄의 인형 처키인가.
"으악. 카입(못생겼어)!"
반사적으로 내 입에서 못생겼다는 말이 나와 버렸다. 그후 곧바로 야신이 그린 그림이라는 걸 인지하고서 얼른 입을 막았으나 이미 쏟아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야신의 커다란 눈망울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거 5분만에 그린 건데.."
놀랍게도 저 그림의 주인공은 나였다. 단발머리에 짙은 눈썹과 웃을 때의 팔자주름. 별이 박힌 목걸이를 하고 모로코 전통 옷 까프탄을 입은. 왼쪽의 말풍선 안에는 'Kinchana'라고 쓰여 있었다.
붑커>> Kinchana는 뭐지?
나>> '괜찮아'.. 내가 맨날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다니니까.
붑커>> 아!
그림의 윗부분에는 'in 5 minutes' 라고 5분만에 완성했다는 자랑스러운 표식까지 있었다. 그런 그림에다 대고 한 첫마디가 못생겼다 였으니. 야신은 낙담하여 방으로 도망쳐 버렸고 나는 미안해서 어쩔줄 몰랐다.
붑커>> 하하. 여보가 항상 착한 말만 하다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니까 더 놀랐나 봐.
나>> 윽 그러게. 순간적으로 내면의 소리가 튀어 나왔어..
나는 야신에게 다가가서 "야신. 이거 나 그린 거였구나. 못생겼으면 잘 그린거야! 내가 좀 못생겼잖아 하하.."
하며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늦게나마 수습을 해보려고 애썼지만 당연히 별 효과가 없었다.
아량이 넓은 야신은고맙게도 곧마음을 풀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로 나는 야신을 볼 때마다 그날의 실수가 떠오른다.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야신에게 더 큰 사랑을 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