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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May 29. 2022

"알 함도릴라 (신에게 감사하게도)"

모로코 여행기 #6

"알 함도릴라 (신에게 감사하게도)"

<지난 이야기>

마라케시에서의 두 번째 날.
세티 파트마의 바위산을 올라가려는데, 본격 등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습게도 이 날은 한 달간의 모로코 여행에서 거의 유일하게 비가 온 날이었다.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산을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갈 만 했다.

쓰고 있는 밀짚모자가 살짝 젖긴 했지만 이 정도 보슬비야 뭐. 그리고 우리 앞뒤로도 산을 타러 온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뒤에 따라오던 한 커플은 파키스탄에서 오신 분들이었다. 좀 전에 베르베르 전통의상 대여점에서 만났던 분들인데, 같이 옷을 입어보다가 친해져서 번호교환까지 했다. 지금은 영국에 살고 계신다는데 나중에 영국에 오게되면 같이 저녁 먹자며 꼭 연락하라고 하셨다. 그 밖에도 가족끼리 놀러온 듯 보이는 사람들, 가이드를 따라가는 한 무리의 여행객들도 보였다.   


붑커>> 여기에는 7개의 폭포가 있어. 지금 이 폭포가 두 번째 폭포야.

나>> 오! 일곱 번째 폭포는 언제쯤 나와?

붑커>> 아직 한참 가야 해. 일곱 번째 폭포를 본 사람은 거의 없어.

나>> 왜?

붑커>> 너무 험준해서 여행객들은 잘 가지 않거든.

나>> 그럼 우리는?

붑커>> 당연히 일곱 번째 폭포까지 보러가야지!


오마이갓. 이런거 너무 좋아.

때로는 위험을 즐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는 나(철딱서니)는 신나서 폴짝거리며 붑커를 따라갔다.


바위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가 장관이다.


점점 구름과 가까워진다.


저 아래로 우리가 지나 온 폭포가 보인다.


드디어 발 아래에 구름이. 이쯤되니 올라오는 사람이 얼마 없다.


발 아래 뽀얀 구름이 가득해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바위산에 내가 서 있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 맛에 높은 곳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 다시봐도 참.. 슬립온 하나 신고 겁도 없이 바위를 디뎌가며 산을 올랐구나 싶다.

예전에도 이런적이 있더랬다.

대학 졸업이 일 년 남은 겨울 방학. 무슨 바람인지 갑자기 '죽기 전에 관동팔경은 봐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뜬금없다. 그리고 관동팔경 중 두 가지는 북한에 있어 지금 당장은 볼 수도 없다. 훗날 가볼 수 있길.) 그래서 그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부터 시작하여 열흘 가량, 혼자 우리나라의 동쪽을 여행했다. 그 때 강원도 속초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1박을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양양의 낙산사를 보러 갈 계획이었다. 그 날은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설악산은 갈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설악산 입구는 보고 가야죠." 하셨고, 팔랑귀인 나는 그렇게 팔랑팔랑 설악산으로 향했다. 근데 이게 무슨일인가. 막상 산 입구에 가보니 눈이 다 녹아있는 것이었다. 이게 웬 떡. 설마 등산로에도 눈이 없을까? 궁금해 하며 얼떨결에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가도가도 눈이 약간만 쌓여있을 뿐 얼어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직도 없네, 아직도 없네 하며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흔들바위였다. 전망대에 앉아 잠시 쉬면서 생각했다. 세상에.. 난 운도 좋지. 이래서 뭐든지 해보라고 하는구나. 시도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가 후회할 뻔 했다. 그렇게 나는 울산바위(경남울산과는 관계가 없다. 울산바위에 올라서면 세차게 휘휘 부는 바람소리가 마치 산이 우는 것처럼 들린다고 하여 울산바위라고 했다.)까지 올라갔다. 사방을 둘러싼 봉우리에 압도당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보았던 설악산의 경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날 나는 치마레깅스를 입었고, 신발은 다 낡은 운동화 하나만 신고 있었다. 산에 오를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로코에서 슬립온을 신고 산에 오른다. 붑커가 '우리 등산도 할 거야'라고 미리 알려주긴 했지만, '필요하면 하나 사서 신지 뭐' 하는 생각으로 등산화를 챙겨오진 않았다. 그치만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다. 슬립온도 생각보다 튼튼하다. 게다가 붑커도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차림이다. 하긴, 붑커는 등산에 도가 텄기 때문에 슬리퍼를 신고도 올라갈 수 있을거다.     

  

위로 올라갈수록 산은 가팔라져서 나중엔 네발로 걷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사진 찍는다고 브이를 날리는 나.


6개의 폭포를 모두 지나자 우리 말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나>> (기대에 가득차서) 일곱 번째 폭포는 언제 나오는거야?

붑커>> 이제 다 왔어. 저기만 넘어가면 되는데...

나>> 근데?

붑커>> 길이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네 하하.

와우. 눈 앞에는 과연 저게 오를수나 있는건가 싶은 바위가 겹겹이 쌓여있었고 그 왼편 또는 오른편으로 올라가면 일곱 번째 폭포가 나온다고 했다. 근데 붑커도 여기에 마지막으로 와 본 것이 8년 전 쯤이어서 잘 기억이 안난다고. 그럼 이제 방법은 한 가지이다. 두 쪽 다 가보는 수밖에.

나>> 나는 오른쪽일 것 같아! 오른쪽을 먼저 가보자.

붑커>> 흠... 나는 왼쪽일 것 같은데. 그럼 가위바위보 해서 정할까?

나>> 오케이! 

누가 이 광경을 봤으면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을 것이다. 다 큰 서른살짜리 두명이 산에서 어느쪽으로 갈지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모습이라니.

"가위 바위 보!"

붑커가 이겼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두 방향 모두 딱히 길이라고 할 것이 없었고 보이는 건 그저 바위 뿐이었기에. 게다가 어느쪽으로 갈 것인지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붑커>> 너 힘들진 않아?

나>> 응 나는 괜찮아. 근데 비가 더 많이 오는데 우리 갈 수 있겠지..?

붑커>> 그럼 갈 수 있고말고!

나>> 오케이, 가보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갔고,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의 등산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폭포를 향해 가기 전 내려다 본 풍경.    




이제부터는 두 발로 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두 손을 같이 써서 바위를 잡고 기어가듯 올라가야 한다. 중간중간 뒤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경사에 눈 앞이 아득해진다. 저기로 굴러 떨어진다면? 으악 안돼 정신 바짝차리자.

조금 변태같을 수도 있지만 사실 무서우면서도 엄청난 짜릿함을 느꼈다. 죽지만 않는다면 뭔들 못해보랴.

그러나.

얼마나 올라갔을까. 비는 멈출 생각을 안하고 안경에 물방울이 맺혀 앞이 잘 안보일 지경이 되자 나는 생명에 약간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바위에 붙어있는 것만도 힘들었는데 붑커는 언제 사진까지 찍었을까.


나>> 붑커, 우리 갈 수 있겠지? 나 조금 무서워졌어.

붑커>> 그래? 그럼 이만 돌아갈까?

나>> 아니.

머리로는 '제발 돌아가. 이만하면 됐다. 안전제일! 몰라?!' 하면서도,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긴 아까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 때였다.

나>> 악!!!!!

붑커>> 조심해! 괜찮아?

휴.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 했다. 빗물 때문에 바위가 너무 미끄러웠다.

그리고 눈 앞에는 정말 큰 바위가 있었다. 한 번 미끄러지니까 덜컥 겁이났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못올라갈 것 같아.

붑커>> 이렇게 하자. 네가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저 위에 가서 이 길이 진짜 맞는 길인지 확인하고 올게.

나>> 그래 그게 좋겠다..!

나는 최대한 평평한 곳을 찾아서 간신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고 붑커는 곧 바위 너머로 사라졌다.




발 밑으로 깎아지른 듯 한 바위가 가득했다. 혼자 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일단 올라오긴 했는데 저기를 다시 어떻게 내려가지? -> 글쎄.

비가 더 많이 오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 아니 정말이다.

어디선가 절벽에 평온하게 서 있는 양인지 염소인지를 봤던 것 같은데 걔넨 대체 어떻게 하는거지?

붑커는 잘 가고 있겠지? 어디쯤 갔을까? 1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왜 안 오지?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혼자서 괜히 안 좋은 상상을 하게된다.
붑커가 다친 건 아닐까? 아냐 그럴리가 없어. 워낙에 산을 잘 타는 친구니까.

하지만 아무리 등산 전문가라도 비 오는 산은 위험하잖아.  

전화를 걸어볼까? -> 바보야 이 높은 산에 전파가 터지겠냐.

내가 올라가볼까? -> 혼자서는 엄두도 안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기다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비는 계속 오고, 옷은 점점 축축해지고, 전화는 먹통이다. 추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몸이 덜덜 떨린다.

이대로 밤이 된다면? 누군가가 우리를 구하러 올까? 우리가 만약 오늘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안돼... 20시간이나 다리 팅팅 부어가면서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온 게 불과 3일 전인데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나>> 붑커!! 어딨어!!! 어딨냐구!!!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을 소리쳐서 불러봤지만 허공에는 빗소리만 들릴 뿐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난 이제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폭포따위 안봐도 좋으니 제발 집에만 가게 해달라고.

그 때,

붑커>> HEY!!!!!

세상에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왈칵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나>> 어딨어!!!!

붑커>> 나 여깄어!!! 여기!!!!

언제 거기까지 간 건지, 오른쪽 저 편에 있는 또 다른 커다란 바위에 서서 붑커가 손을 흔들었다.

붑커>> 폭포 찾았어!!! 좀만 기다려 그 쪽으로 다시 갈게!!!

일단 붑커가 멀쩡한 걸 알고나니 떨리던 몸이 진정되었다. 휴. 십년감수했네.

곧 돌아온 붑커의 머리에는 모자가 없었다. 쓰고 있던 캡모자를 중간에 길표시를 위해 두고왔다고 했다.  

붑커>> 나 기억났어! 옛날에 내가 갔던 방향은 이쪽이 아니라 반대쪽 길이었어. 이쪽 길은 빠른 대신 험하고, 저쪽 길은 조금 먼 대신 덜 험하고.

나>> 나 너 진짜 다친 줄 알았어. 엄청 걱정했다고!

붑커>> 하하! 바보야 그런 일은 없어. 너 힘들면 돌아가고 아니면 저쪽 길 따라서 폭포 보러 가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새 말짱해져서 붑커와 함께 다시 폭포를 보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 하늘이 노하셨는지 비가 더 신나게 내리기 시작했다. 목숨만 살려달랄 땐 언제고 또 욕심을 부려!라고 나무라는 것처럼.

붑커>> 우리 돌아가야겠다.
나>> 조금만 더 가면 나올텐데..! (진짜 정신 못차리지)

붑커>> 맞아 그렇긴 한데 지금은 위험해. 비가 멈출 것 같지 않아. 다음에 꼭 다시 오자. 나 어차피 모자 찾으러 다시 와야 해, 하하하하.

나>> 하하 그래 꼭 다시 오자.

붑커의 입에서 위험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이건 정말 위험하다는 뜻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더욱 미끄러워진 바위를 되짚어 내려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조심조심 내려오다보니 드디어 두 발로 디딜 수 있는 평지가 나타났다. 그리웠어 이족보행.



   

  

우리는 무사히 내려와서 젖은 몸을 녹이고 허기진 배도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갔다.

'하레라'(콩, 야채, 향신료 등을 갈아서 묽게 끓여 낸 스프. 약간 붉은 빛이 돌고 개운한 맛이 난다.)와 삶은 계란을 시켜서 먹으니 온몸에 훈훈하게 온기가 돈다.

붑커>> 그거 알아? 아까 우리 산에 올라가는 길에 먼저 등산하고 내려오던 사람들 몇 명 만났잖아.

나>> 응응.

붑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했게.

나>> 그냥 인사한 거 아니었어? 뭐라고 했는데?

붑커>> '오늘은 날씨도 안 좋고 매우 위험하니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거다.'라고 했어.

나>> 뭐?!!!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붑커>> 하하하하하!

나>> 너 미쳤구나 하하하하!

붑커>> 내가 만약 미리 말해줬으면 너는 겁먹어서 등산을 맘껏 즐기지 못했을거야. 그리고 겁먹은 채로 움직이면 다칠 확률도 커지고. 이왕 올라갈 거면 모르는 게 훨씬 낫지. 하하하하.

나>> (이 x끼 미친거 맞네)

붑커>> 어쨌든 알 함도릴라, 우린 좋은 추억도 만들고 무사히 돌아왔잖아.

나>> 그래 그건 맞아, 하하. 알 함도릴라.


때로는 살짝 미친 친구를 두는 것이 인생을 더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칫 인생을 빠르게 마감하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




알 함도릴라.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뜻.
감사한 일, 안도할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쓰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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